주간동아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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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물막이판’에 의지해 침수 불안에 떠는 반지하 주민들

[르포] 폭우 피해 잦은 서울 관악·동작·서초구 미봉책… ‘대심도 빗물 터널’은 착공도 못 해

  • 김우정 기자 friend@donga.com, 윤채원 기자 ycw@donga.com, 임경진 기자 zzin@donga.com, 전혜빈 기자 heavin0121@donga.com

    입력2024-07-1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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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많이 내리면 밖에서 들어오는 물살이 거센 데다, 집집마다 하수구에서 물이 역류한다. 올해도 지지난해처럼 큰 홍수 피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이다.”(서울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빌라 주민 A 씨)

    “지난해 여름 내내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발등까지 차올랐는데, 그 정도는 이 동네에서 물난리도 아니다. 지지난해에는 무릎까지 물이 찼다. 하수구 역류 방지 트랩을 설치해 어느 정도 효과를 봤지만 침수 자체를 막을 순 없었다.”(서울 동작구 사당동 반지하 빌라 소유주 유모 씨)

    주간동아가 2022년 8월 폭우로 큰 피해를 입은 서울 관악구와 동작구 반(半)지하주택 109채를 7월 5일과 8일 직접 찾아가 취재한 결과 상당수가 여전히 침수에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지난해 인명사고가 발생한 관악구 신림동, 동작구 상도동 다가구주택 밀집 지역은 차수판(물막이판), 개폐형 방범창 설치·관리 등 수해를 막을 수 있는 안전 조치가 여전히 미흡했다. 해당 지역 주민들은 “근본 해결책 없이 올여름 장마철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강남역 일대를 중심으로 침수 피해가 컸던 강남구와 서초구 상가 55곳에서 만난 상인들도 “물막이판만으론 수해를 막을 수 없다”며 불안해했다.

    “물막이판 달았어도 불안”

    2022년 8월 8일 집중호우에 따른 침수로 일가족 3명이 숨진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한 반지하주택의 올해 7월 8일 모습. [전혜빈 기자]

    2022년 8월 8일 집중호우에 따른 침수로 일가족 3명이 숨진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한 반지하주택의 올해 7월 8일 모습. [전혜빈 기자]

    2022년 8월 8일 서울에는 시간당 최대 141.5㎜의 집중호우가 내렸다. 국내 하수도 배수 능력(2011년 이전 시간당 50~80㎜, 그 후 60~95㎜)을 웃도는 강수량이었다. 서울에서도 피해가 유독 컸던 강남·관악·동작·서초구의 공통점은 물이 고이는 계곡형 지형이라는 것이다. 강남역 일대는 주변보다 지대가 낮은 분지형 구조다. 관악구와 동작구는 인근 관악산과 그 지맥에서 빗물이 모여 내리친다.

    7월 8일 오전 11시 기자는 2022년 집중호우에 따른 침수로 일가족 3명이 숨진 관악구 신림동 빌라촌을 찾았다. 당시 인근 빌라에 거주했던 B 씨는 “그때 어찌나 빗물이 빠르게 차오르던지 근방의 모든 반지하주택이 물에 잠겼다”며 “주민들이 총동원돼 반지하주택의 물을 퍼냈다”고 회고했다. 사망자가 발생한 곳 인근 반지하주택에서 15년째 거주 중인 C 씨는 지지난해 홍수 때 집 안으로 물이 정강이 위까지 차오르자 급히 탈출했다. 그 후 집에 물막이판을 달았으나 여전히 불안감이 크다고 한다. C 씨는 “하수도 물이 안 빠져나가면 지지난해 같은 침수 피해를 언제 또 입을지 모른다. 물막이판 효과는 일시적일 거라고 본다”고 말했다.

    관악구 신림동, 신사동 일대는 서울 서남부를 휘감아 도는 도림천이 있어 예전부터 여름철 수해가 잦았다. 이 지역에는 서민이 주로 거주하는 반지하주택이 많아 집중호우가 내리면 피해가 크다. 지면과 맞닿은 반지하주택 창문과 출입문으로 물이 들어오거나, 하수도에서 물이 역류하면 눈 깜짝할 새 집 안에 고립된다는 게 주민들 설명이다. 이에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서 집중호우 시 외부 빗물 유입을 막는 물막이판을 보급했지만 주택 소유주 동의가 필수라 한계가 있다. 기자가 현장에서 직접 확인해보니 2022년 사망자가 발생한 신림동 빌라에서 반경 170m의 반지하주택 30채 중 7채에는 물막이판이 설치돼 있지 않았다. 당장 물막이판이 설치된 일부 주택도 1층 출입구에만 있고 정작 반지하주택 창문에는 없었다.

    주민 사이에선 “집주인들이 물막이판 설치를 꺼린다”는 말도 나왔다. 신림동의 한 부동산공인중개사는 “침수 우려 지역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을 의식한 집주인이 반대하면 물막이판을 달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물막이판 거부’ 현상은 비단 특정 지역만의 문제는 아니다. 서울시가 2022년 6월~2023년 8월 침수 우려가 있는 주택 2만4842채를 대상으로 물막이판 설치에 나섰지만 현재까지 설치된 곳은 1만5259채(61.4%)에 그쳤다. “일부 공동주택에서 물막이판 설치 시 침수 우려 지역 낙인과 집값 하락을 우려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서울연구원 측 분석이다.

    ‘개폐형 방범창’ 이용법 모르는 주민도

    7월 8일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한 반지하주택 창문에 설치된 물막이판이 떨어져 있다. [임경진 기자]

    7월 8일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한 반지하주택 창문에 설치된 물막이판이 떨어져 있다. [임경진 기자]

    2022년 폭우로 또 다른 인명사고가 난 동작구 반지하주택 밀집 지역도 침수 대비에 허점이 보였다. 당시 상도동 반지하주택에 살던 50대 여성이 침수된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숨진 채 발견됐다. 7월 5일과 8일 기자가 동작구 사당동, 상도동의 반지하주택을 둘러본 결과 창문에 달아둔 물막이판이 파손됐거나 아예 설치되지 않은 곳이 많았다. 현장에서 만난 한 반지하주택 소유주는 기자가 물막이판이 훼손된 채 방치된 이유를 묻자 “자동차가 물막이판을 한 번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찌그러진 것 같다. 얼른 펴두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지역 주민들도 집중호우 때 화장실이나 다용도실 하수구에서 물이 넘쳐 침수 피해를 입었다고 전했다. 사당동에서 냉면집을 하는 권모 씨(61)는 “2022년 식당 입구에 물막이판을 설치해두고 그 앞에 서서 물이 들어오는지 지켜보는데 갑자기 바지가 축축해졌다. 하수구에서 물이 역류해 식당 안쪽부터 물이 차고 있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동작구는 주민 신청을 받아 물 역류를 막는 ‘하수구 트랩’을 반지하주택과 소규모 상가를 중심으로 설치하고 있다. 하지만 하수구 트랩으론 물 역류를 완전히 막기에 역부족이라고 주민들은 말했다.

    반지하주택이 침수되면 평소 쓰던 출입구는 지상에서 유입된 물의 수압 탓에 쉽게 열리지 않는다. 이 경우 창문이 유일한 탈출구인데, 만약 방범창으로 가로막혀 있다면 자칫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수해에 대비해 집 안에서 여닫을 수 있는 개폐형 방범창을 보급하는 이유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주민 상당수는 개폐형 방범창이 설치됐는지 여부와 사용법을 모르고 있었다. 사당동 반지하방에 사는 80대 주민 도모 씨는 “우리 집 방범창은 고정돼 있다”며 손으로 잡아당겼다가 방범창이 쉽게 열리자 깜짝 놀라는 모습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창문 아래 스위치에 ‘방범창 잠금 해제’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기자와 대화하던 도 씨에게 이웃 반지하방 소유주가 다가와 “반지하방에 세입자가 들어오지 않으니 침수 피해가 난다고 이야기하지 마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집중호우로 대규모 침수를 겪은 강남 일대 역시 장마철을 맞아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 이곳 주민들 사이에선 이른바 ‘3대 침수 지역’이 있다. 서울지하철 강남역과 대치역 부근, 서초동 진흥아파트 앞이다. 2022년 8월 집중호우 때도 이 일대는 어김없이 물에 잠겼다. 강남역에서 신논현역까지 이어지는 약 2만㎡, 진흥아파트 부근 약 3만3000㎡ 등 축구장 7개 면적이 침수됐다. 인근 주민과 상인들은 주변보다 지대가 낮고 빗물이 고이는 강남 지형 특성상 언제든 수해가 재발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기자가 7월 5일 신논현역과 강남역을 잇는 서초대로 75길과 77길 일대 상가를 살펴보니 물막이판을 설치한 건물은 34개 중 17개에 불과했다. 같은 건물이라도 점포마다 물막이판을 설치한 양상은 제각각이었다. 출입구와 맞닿은 가게에는 물막이판이 있지만, 대로변과 떨어져 있거나 계단 위로 출입구가 있는 가게 중에는 물막이판이 없는 곳도 있었다.

    강남 상인들과 주민들은 물막이판 설치가 의무화되고 관리도 잘 이뤄졌다면 침수 피해가 적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서초구 한 지하상가에서 두부 전문점을 운영하다 2022년 침수 피해를 입은 이모 씨(45)는 1년 가까이 지난 지난해 5월에야 가게를 다시 열 수 있었다. 이 씨는 “당시 있던 물막이판은 덜렁거려 부실했다. 1층 물막이판이 온전히 제구실을 했다면 그 정도 피해는 입지 않았을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비닐로 감싸고… 상인들 궁여지책

    반복되는 침수에 상인들은 궁여지책으로 대응하고 있다. 진흥아파트 상가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50대 후반 이모 씨는 바닥 쪽에는 옷을 두지 않는다. 2단 행거에서 1단은 일부 비우고 옷을 전부 위로 올려둔다. 장마철 가게 안으로 물이 들이닥칠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이다. 강남역 지하상가 옷 가게 주인인 윤모 씨(51)는 장마철엔 옷을 전부 비닐로 싸두고, 퇴근 후 폭우 소식이 있으면 CC(폐쇄회로)TV로 계속 가게 상황을 확인한다. 윤 씨는 “2022년에도 물막이판이 있었지만 침수 피해를 입었기에 안심되지 않는다”며 한숨을 쉬었다.

    전문가들은 ‘대심도 빗물 배수터널’ 건설을 근본 해결책으로 꼽는다. 대심도 빗물 배수터널은 지하에 빗물을 보관하는 큰 터널을 만들어 시간당 100㎜ 이상 되는 비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시설이다. 서울시도 2022년 8월 폭우 이후 강남역·광화문·도림천에 대심도 빗물 배수터널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착공조차 못 했다. 공사비 상승으로 건설업계가 입찰을 꺼렸기 때문이다. 서울시가 3개 빗물터널 건설 총 사업비를 기존 1조2052억 원에서 1조3689억 원으로 증액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시공사를 선정할 수 있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7월 9일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현재 업체들이 대심도 빗물 배수터널을 설계 중이며, 올해 말 착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집중호우 예방 대책에 대해 조원철 연세대 건설환경공학과 명예교수는 “기후변화로 강우 패턴의 국지성과 시간 집중성이 강해지고 있는 만큼 그에 맞춰 도시 설계 자체를 바꿔야 한다”면서 “지하·반지하 공간은 주거지로 쓰지 않도록 하고, 도심 침수 시작점인 도로 빗물받이에서 중소 규모 하수도, 대심도 빗물 배수터널로 이어지는 시설을 제대로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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