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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신부를 위한 ‘손익계산서’
최근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출산을 권하는’ 사회다. 비혼(非婚)이거나 아이 없이 사는 커플이 가장 큰 스트레스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이 바로 주변의 결혼 및 출산 권유다. 설령 아이가 있다 해도 이 ‘권유’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아이를 데리고 택시를 타면 운전석 너머로 어김없이 “애가 하나예요? 어서 동생 낳아야겠네”라는 말이 들려온다. 결혼과 출산은 엄연히 개인의 선택이고, 그 선택에는 저마다의 이유와 사연이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이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막상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나는 ‘어르신’들이 왜 출산을 그토록 권하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한 후배는 “중·장년층은 요즘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그런다”고 분통을 터뜨리지만, 사실 그들이라고 육아가 힘들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잊었을 수는 있겠지만). 세탁기도, 일회용기저귀도 없던 시절, 학교 급식이 없어 도시락을 아이마다 두 개씩 싸줘야 하던 시절, 살림살이가 넉넉지 않아 아이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못해 겉으로는 화를 내고 속으로는 눈물을 삼켜야 하던 시절을 보낸 이도 많을 테니. 아이 없이 혼자, 혹은 둘이 살면 매일의 삶이 조금 덜 고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도 모르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주는 기쁨과 키우는 보람이 삶에 주는 의미를 알기에, 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머뭇거렸을까. 선뜻 A에게 “하루라도 빨리 엄마가 되세요”라고 권하지 못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임신, 출산과 함께 달라질 A의 일과 삶에 대한 ‘손익계산서’가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A는 임신과 동시에 더는 일에만 집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을 것이다. 임신 초기의 피로, 늦은 나이의 임신에 따른 유산의 공포, 그리고 정신없이 구토하는 입덧이 지나고 나면 무거워진 몸으로 인한 거동의 어려움, 수면 질의 저하, 분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출산을 위해 해야 하는 소소하지만 중요한 온갖 준비가 그를 기다린다.
무사히 아기를 만난 기쁨도 잠시, 산후조리를 채 마치기도 전 A는 수유의 어려움과 그로 인한 쪽잠에 시달리고, 쉴 새 없이 울어대는 아기 옆에서 화장실조차 마음대로 갈 수 없게 된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 와중에 이유식을 만들어야 하고, 매번 1시간이 걸리더라도 아기에게 끼니마다 이유식을 충분히 먹여야 한다. 기저귀를 갈고 아기를 목욕시키는 것은 기본이다. A는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국제업무에 능통한 재원이지만, 그가 그동안 쌓아온 훈련과 경력이 엄마라는 새 ‘임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매 순간 깨닫고 자신의 무능함을 절감할 테다.
물론 ‘마트레센스(Matrescence)’로 불리는 ‘엄마의 사춘기’ 시절을 여차저차 잘 거쳐내면 상황은 좀 나아지고, A는 아기의 사랑스러움에 푹 빠져 행복한 나날을 누릴 것이다. 아이가 크면 어린이집에 보내거나 할머니에게 맡기고 일터로 돌아올 수도 있다.
자, 이제 A의 일상은 출산 전으로 돌아갈까. A는 더는 맘 놓고 야근을 하거나, 자기계발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으며, 최대한 빨리 업무를 마치고 퇴근해서는 육아와 살림을 해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퇴근시간이 일정한 직업이나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해야 해 커리어와 소득에 손실이 생길지도 모른다.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본의 아니게 일에 차질을 빚거나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된다는 것도, 이런 일이 생각보다 자주 발생한다는 것도 알게 되리라. 주말에는 더 많은 집안일과 육아가 기다린다. A와 결혼할 예비신랑은 좋은 사람으로 보였지만, 적잖은 나이인 그 역시 자신의 커리어에서 핵심적인 시기를 잘 보내려면 장기간 근로와 높은 피로를 피할 수 없을 터이기에, 아마도 A의 어려움을 많이 덜어주진 못할 것이다.
‘상사나 고용주가 육아 현실 이해하느냐’
출산 후 많은 여성이 학업과 사회생활로 쌓아온 자신의 경력이 엄마라는 새 임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shutterstock]
이는 막대한 예산을 퍼붓고도 저출산 심화를 막지 못하는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정부도, 어르신들도 ‘말로만’ 출산을 권할 뿐, 실제 젊은이들이 처한 상황이나 이들이 원하는 것에 귀 기울이려는 노력은 부족하다. 저출산 극복이 국가적 과제라고들 하지만, 아이 키우는 부모는 정말로 한국 사회에서 충분히 지지받고 있다고 느낄까. 일례로 유아와 초등학생이 사교육에 과도하게 노출돼 있다고 많이들 비난한다. 그런데 아이를 데리고 외출할 곳이 문화센터 정도에 불과한 초보 엄마와 초등학교 하교 후 맡길 곳이 없어 학원을 전전하게 할 수밖에 없는 학부모의 마음을 우리 사회는 얼마나 헤아리고 있을까. 그러한 처지와 마음을 이해한다면 등·하원 차량의 아이 전용 안전벨트 장착 여부와 운전자 자격 요건 강화 같은 것들을 꼼꼼히 챙기지 않을까.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영국에서 공부하고 일하다 아이 없는 8년 차 커플로 귀국했을 때 내가 속한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B교수는 내게 “자녀를 낳아야 한다”고 수차례 권했다. “교수님, 엄마가 되면 제 생산성이 엄청 떨어질 텐데요” 하면 “잘 도와줄 테니 걱정 마라”고 했다. 이건 빈말이 아니었다. 출산 후 나는 고정된 출퇴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업무 위주로 배당받아 일주일에 2~3일은 낮에 아기를 돌보고, 아기가 잠든 밤에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다. 한번은 내가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B교수가 나 대신 아기를 두어 시간 안고 있기도 했다. B교수는 비슷한 시기에 출산한 대학원생을 위해 대학원에 수유실도 만들어줬다. 회식은 모두가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주로 점심시간에 했다. 독감 걸린 아이를 돌보느라 휴가를 내야 했을 때는 “아이는 1000번을 아파야 큰다”며 기꺼이 일정을 조정해줬다.
권유에는 책임 따른다
영국의 한 조사에서는 일하는 부모들이 저출산 극복을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상사나 고용주의 육아 현실에 대한 이해’를 꼽았다. [동아DB]
A가 일하는 조직에서 이러한 지지를 받을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엄마가 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힘들긴 하지만 정말 좋다고, 이 길을 걷기로 맘먹는다면 진심으로 환영하겠노라고.
젊은 세대에게 출산을 권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 국가의 미래를 염려하기 때문일 수도, 아이가 주는 기쁨을 놓치지 않길 바라는 애틋함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권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출산을 권하기 전 예비 엄마아빠들이 아기를 낳아 키울 수 있도록 굳건한 지지와 세심한 배려를 해줄 준비가 돼 있는지를 우리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