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19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인근에서 보수 단체 회원들이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찬성하는 집회를 하고있다(왼쪽). 12월 22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통합진보당 전 의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재연, 이상규, 오병윤, 김미희 전 의원.
2014년 12월 19일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심판 청구 사건 선고에서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재판관 8 대 1 의견으로 정당해산을 결정했다고 밝히자 정부 측 인사들과 통진당 인사들의 표정은 극명히 엇갈렸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소속 권영국 변호사가 “오늘로써 헌법이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살해한 날”이라고 고성을 지르다 직원들에게 끌려 나가기도 했다. 이날 헌법재판소(헌재) 결정으로 2011년 12월 창당한 통진당은 3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통진당 해산은 정치권에 메가톤급 후폭풍을 불러왔다. 그동안 ‘정윤회 문건’ 파문으로 수세에 몰려 있던 새누리당은 야당에 대한 공세에 적극 나섰다. 해산 직후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던 새누리당은 해산 결정이 있은 사흘 뒤부터 지난 총선에서 통진당과 야권연대를 추진한 새정치민주연합 책임론을 정면으로 거론했다.
# 정치권 메가톤급 후폭풍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2014년 12월 22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집권만을 위해 통진당과 연대했던 새정치연합은 종북과 헌법 파괴를 일삼는 낡은 진보 세력과 절연을 선언해야 한다”며 “건전보수 대 건전진보의 경쟁으로 국민의 선택을 받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새누리당 이군현 사무총장은 “통진당의 국회 진출에 큰 역할을 한 민주통합당(새정치연합 전신)의 당시 지도부는 한마디 책임 있는 사과와 반성도 없다”면서 “당시 정치공학적으로 했던 주고받기식 야권단일화를 통렬히 반성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반면 막판에 ‘통진당 해산 반대’로 돌아선 새정치연합은 곤혹스러운 모습이다.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은 2014년 12월 10일 “정당해산 결정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전례가 없다”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헌재 결정을 앞두고 야당이 사실상 헌재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처럼 비쳐진 탓이다. 이후 새정치연합은 “문 위원장 발언은 당론이 아니다”라며 파문 진화에 나섰지만, 당내에선 “그러니깐 종북으로 오해받는 것”이라는 우려가 터져 나왔다. 여기에 12월 17일 ‘통진당 강제해산 반대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원탁회의’에 새정치연합 정동영 상임고문과 당내 의원들이 참석해 논란이 일었다.
특히 새정치연합 지도부와 유력 인사들이 정당해산 결정 직후 “헌재 판결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면서도 “정당의 자유가 훼손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고 말해 헌재 결정에 불복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새정치연합 우윤근 원내대표는 “현재의 헌재 구성 방식으로 민주적 정당성 확보가 가능한지, 구조적 편향성을 탈피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에 찬성하는 여론이 높게 나오자 새정치연합은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내부적으로는 헌재 결정 이후 반(反)청와대, 반(反)여권 기류가 강화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정작 여론은 통진당 해산 찬성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이다(26쪽 참조).
그러다 보니 새정치연합 내부에서도 야권연대 책임론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김영환 4선 의원은 2014년 12월 19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왜 우리는 종북으로 의심받는 정당과 그토록 연대에 목말라하고 통합을 애걸했으며, 우리 후보는 대선(대통령선거) 내내 이정희 후보에게 끌려다녔는가”라며 반성을 촉구했다. 호남의 한 의원은 “지역에 내려가 보면 해산 결정을 잘했다는 의견이 많다”며 “앞으로 괜히 선거 연대 등으로 손잡았다가는 역풍을 맞을 것 같다”고 전했다. 이런 기류를 반영한 듯 12월 24일 당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선 통진당 해산과 관련한 별도의 언급이 전혀 없었다.
통진당은 2014년 12월 19일 헌재 결정 직후부터 사실상 헌재 결정 불복운동을 벌이고 있다. 오병윤 전 원내대표와 김재연 전 의원은 12월 22일 라디오에 잇달아 출연해 “권한이 없는 헌재가 의원직을 상실시킨 만큼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혔다. 당 인터넷 홈페이지 간판을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저지 민주수호 투쟁본부’라고 바꿔 달면서 사용이 금지된 통진당 명칭도 교묘하게 이어받았다. 정강정책과 당원게시판 등만 없앴을 뿐 기존 홈페이지 주소도 그대로다. 통진당 전 의원들은 헌재 결정에 반발해 교대로 1인 시위에 돌입했고, 의원직 상실 결정 취소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기로 했다. 김상근 목사, 함세웅 신부 등 11명은 12월 22일 ‘통진당 강제해산에 따른 비상원탁회의’를 구성해 이들에 힘을 보태고 있다.
# ‘소송’ ‘재출마’…사실상 불복한 통진당
그러나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은 2014년 12월 24일 경기 김포시 해병대 2사단을 방문한 자리에서 “헌재는 최종심이자 단심(單審)으로 우리 헌법에 규정돼 있어 불복은 가능하지 않다”고 못을 박았다. 통진당 전 의원들이 조직적인 불복 의사를 드러내자 이례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헌재의 결정문은 재판관들이 고뇌하면서 최선을 다한 판결”이라고 부연했다.
반면 의원직을 잃은 통진당 지역구 의원들은 4월 보궐선거 출마를 염두에 둔 듯 지역구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헌재가 통진당 해산과 소속 의원들의 의원직 박탈을 선고하면서 의원직을 상실한 5명의 피선거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 피선거권은 유지하게 됐기 때문이다. 내란음모 사건으로 대법원 판결을 앞둔 이석기 전 의원을 제외한 4명은 2015년 4월 보궐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는 얘기다. 김미희 전 의원은 라디오에 출연해 “지역구 주민 ‘백이면 백’ 다들 위로하면서 너무 잘못됐다고 얘기한다”며 “(향후 행보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통진당 해산이 결정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제2 통진당’이 탄생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오병윤 전 원내대표는 2014년 11월 23일 임시당대회에서 “해산하게 되면 다시 만들면 된다”고 해 논란을 빚었다. 현행 정당법은 해산된 정당의 강령과 같거나 비슷한 정당을 창당하지 못하게 규정하고 있다. 유사 당명 사용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규정들만 어기지 않는다면 통진당 인사들이 창당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는 “구체적으로 신당 강령을 평가해야겠지만 헌재에서 지적한 문제점들이 빠져 있다면 현행법상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가 2014년 12월 22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에 따른 비상원탁회의’에서 “통진당 해산은 나에게 가장 무거운 책임이 있다”며 참석자들 앞에서 사과의 절을 하고 있다.
통진당은 2011년 12월 창당 이후 3년간 163억여 원의 국고보조금을 받았다. 이 중 2013년 11월 해산 심판이 청구된 이후 1년 동안 받은 국고보조금은 선거보조금 28억여 원 등을 포함해 60억7600여만 원. 3년간 기탁금도 14억4400여만 원에 이른다. 이미 지출한 국고보조금은 소급 적용해 반환을 요구할 수 없어 쓰고 남은 보조금만 환수 가능하다. 하지만 선관위 실사 결과 통진당에 남은 국고보조금은 거의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통진당 해산 절차가 끝나면 통진당발(發) 정계 개편도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새정치연합 내부는 물론 그동안 신당 창당을 주장해왔던 인물들 사이에선 이번 해산을 계기로 야권의 전면 개편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적잖은 게 사실이다. 야권 관계자는 “통진당이 해산되면 진보진영의 위축은 불가피하다”면서 “통진당 해산을 계기로 재야 야권 세력은 물론 정의당 등과 합당 등을 통해 야권을 재편해야 한다는 소위 ‘빅텐트론’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새정치연합의 차기 당권 경쟁을 둘러싸고 비노(비노무현)계인 정동영 상임고문의 신당 창당설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통진당 해산 결정으로 정치권 안팎에선 친노(친노무현)계를 제외한 여러 정당 및 새로운 형태의 진보 세력 출현이 임박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진보진영 재편 움직임은 2014년 12월 24일 새로운 진보적 대중정치 복원을 촉구하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건설을 촉구하는 모임’(가칭·국민모임)이 등장하면서 본격화됐다. 함세웅 신부, 김상근 목사, 명진 스님 등 종교계와 문화예술계, 노동계, 언론계 인사 100여 명이 참여한 국민모임은 이날 선언문을 통해 “국민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건설을 촉구한다”며 “새로운 정치세력 없이는 정권교체도 없으며, 안전한 대한민국과 서민의 행복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핵심 가치로 △평화생태복지국가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없는 사회 △그들의 의사와 이해관계를 진정으로 대변하는 정치체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참여민주제 △한반도 평화체제를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건설 등을 주창했다.
그러나 과거 통진당의 정당 지지율이 1~3%대로 낮았고, 통진당 해산 결정에 찬성하는 국민 여론이 60% 이상 나오는 상황에서 재야인사들의 진보 세력 결집화가 얼마나 국민의 공감대를 끌어낼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오히려 진보진영에선 이번 기회에 과거 이념 중심의 진보정치에서 일자리와 복지 등 국민생활형 진보정치로 무게중심을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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