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운데)가 10월 17일 국회에서 열린 당 국정감사대책회의에 참석해 ‘방중 개헌 발언’에 대해 “바로 꼬랑지(꼬리)를 내렸다”며 사과하고 있다. 개헌 반대 의견을 견지해온 이완구 원내대표(왼쪽)가 김 대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힘의 충돌’ 끝이 아닌 시작
하지만 언제나 박명수 이름 앞에는 유재석이 존재한다. 박명수의 처세 역시 때론 유재석과 티격태격하지만 결국 유재석의 존재를 더욱 부각하는 방식이다. 유재석도 2인자라고 박명수를 괄시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1인자와 2인자의 조화로운 공생관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여의도 정치권에서 2인자의 구실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대통령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여당대표는 1인자가 될 수 없다. 어차피 2인자인 것이다. 살아 있는 절대 권력인 대통령과 여당대표의 관계는 예능계의 1인자와 2인자의 그것보다 더욱 복잡 미묘하다. 2인자의 운명은 대통령 임기가 다하기 전까지 유력한 차기 대권후보가 되느냐, 아니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느냐는 기로에 서 있기 때문이다.
최근 여의도 정치권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든 이슈는 개헌론이다. 개헌론의 중심에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있는 것으로 비쳐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 블랙홀’을 언급하며 개헌론이 정치권으로 확산하는 것을 차단하고 나섰다. 이것이 박 대통령과 김 대표 간 갈등으로 인식되면서 김 대표의 차기 대권 지지율은 10%대 초반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런데 곧바로 박 대통령이 칼을 빼든 ‘공무원연금 개혁’ 이슈를 김 대표가 앞장서 지원하고 나섰다. 극적인 이슈 대전환이다. 그렇지만 김 대표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크게 달라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차기 대통령선거(대선) 후보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거론되면서 김 대표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약화된 느낌이다. 의욕적으로 제시한 개헌론이 김 대표의 대권 행보에 치명적인 걸림돌이 된 것처럼 보일 정도다.
대통령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김 대표는 다각적인 노력을 시도했다. 10월 29일 박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이 있던 날 단독 회동을 노렸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여야 지도부 회동에서는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이 김 대표를 감싸는 발언까지 내놨지만 대통령 반응은 탐탁지 않았다. 오히려 김 대표에 반기를 들었던 김태호 전 최고위원과 대통령 사이에 흐뭇한 장면이 몇 번 연출됐다. 김 대표는 시정연설 다음 날에 있었던 연설에서도 개헌 관련 언급은 끝내 하지 않았다. 대통령을 의식한 행보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대통령과의 ‘힘의 충돌’에서 상처 입은 김 대표의 대권 로드맵은 사실상 끝난 것일까. 정치적 한계를 조기에 드러내고 좌초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김 대표의 대권 도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다음 세 가지를 유념하면 개헌론을 통한 대통령과의 이슈 파이팅은 김 대표에게 새로운 모멘텀을 만들어줄 수 있다.
첫째, 아직은 2인자가 등장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적어도 2016년 총선 이후 정도는 돼야 한다. 이때가 돼야 총선 결과와 목전에 다가온 대선을 두고 다양한 정치적 셈법이 전개될 수 있다. 개헌론은 일반 정책과 사뭇 다르다. 헌정 질서와 미래 권력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개헌론의 주도권을 쥐는 것은 사실상 미래 권력의 중심이 되는 것으로,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과반에 가까운 국민 지지를 등에 업은 박 대통령이 이런 상황을 묵과할 리 없다.
개헌을 공약으로 내건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9년 내각제 합의 논란에도 개헌론이 부상하는 것을 극구 막았다. 대통령 임기 2년 차까지는 2인자가 비집고 들어설 수 있는 환경이 성숙되지 않는다. 김영삼 정부 당시 최형우 전 의원이 바로 이런 경우다. 최 전 의원은 당시 민주자유당 사무총장을 맡으며 ‘변화와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개혁 코드의 주인공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을 포함한 주변의 견제를 받으면서 최 전 의원의 대권 도전은 사실상 좌초됐다.
정대철 전 의원은 어떤가.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후 그의 정치 역정은 얼룩지고 말았다. 당내 대선후보였지만 김대중 정부 들어 맡은 보직은 정치와 무관한 한국야구연맹 총재 자리였다. 2000년 총선에서 무난히 당선해 5선 의원이 됐지만 같은 해 전당대회 대표 경선에선 고작 7위에 그쳤다. 2002년 김 대통령의 지지율이 바닥에 이르는 시점에서야 대표 경선에서 가까스로 2위에 오를 수 있었다. 대통령 지지율이 높은 상황에서 대권 의지를 드러내거나 대통령을 상대로 이슈 파이팅을 하는 것은 그만큼 힘든 것이다(그래프1 참조).
지지층 묶어내는 일 최우선 과제
야당은 개헌과 관련한 박 대통령의 시각에 대해 ‘독재’라는 비판까지 서슴지 않았다. 흡사 정적인 김무성 대표를 도와주는 형국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권 도전에 나선 김 대표로서는 2016년 총선 정도까지는 ‘도광양회’(韜光養晦·자신의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는 뜻)를 하며 잠룡 상태로 지내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
둘째, 지지층에서의 영향력 확대다. 김 대표는 전당대회 승리 후 여러 가지 개혁 방안을 내놓았다. 출판기념회 폐지, 비행기 이코노미석 이용, 상습적인 낮술 금지 등 사소하지만 대중의 호응을 받을 만한 내용이다. 아이스 버킷 챌린지(루게릭병 환자를 위해 얼음바구니를 뒤집어쓰고 기부하는 국제적 이벤트)에 참여하며 청년 세대와의 간극을 좁히는 행동도 보여줬다.
하지만 김 대표가 개헌론을 제기한 뒤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듯한 모습으로 발전한 건 화근이었다. 대통령과 김 대표를 ‘같은 편’으로 인식했던 새누리당 지지층에서 균열이 발생했다. 갈등 관계가 조성되기 전인 9월 21~22일 조사결과, 새누리당 지지층의 대통령에 대한 긍정평가는 응답자 10명 중 9명에 가까운 87.2%였다. 새누리당 지지층 사이에서 대통령의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다. 반면 차기 대권후보 선호도 조사 결과, 새누리당 지지층의 김 대표에 대한 지지율은 20.1%였다(그래프2 참조). 김 대표의 개인적 지지 기반은 매우 취약한 상태인 셈이다.
대권 도전을 꿈꾸는 김 대표에게 최우선 과제는 새누리당 지지층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살아 있는 권력인 현직 대통령에 맞서 자기 뜻을 관철했던 2인자, 그리고 연이어 1인자가 된 인물들의 공통점은 견고한 지지 기반이었다. 노태우 정권 후반 내각제 개헌에 반대하며 경남 마산으로 낙향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과 맞서 뜻을 관철할 수 있었다. 부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 기반과 상당수 민주화 세력에게 지지를 받던 그의 영향력을 대통령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박근혜 당시 의원도 대통령의 세종시 수정안 계획에 강력하게 맞서 원안을 관철할 수 있었다. 현직 대통령에 버금가는 지지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 대표는 개헌론 파동을 겪으면서 지지층을 묶어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당대표 선거 때만 해도 상당수 당내 인사가 ‘김무성’을 연호했다. 그중에는 친박(친박근혜)계 의원도 적잖다. 그러나 개헌론 정국에서는 엄동설한보다 더 싸늘하게 돌아서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셋째, 지지층을 넘어선 영향력 확대를 모색해야 한다. 김 대표는 개헌론 논란 직후 대통령에게 심려를 끼쳤다며 개헌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통령과의 힘 대결에서 완패하고 협력적인 당청관계를 강조하는 것처럼 비쳤다. 급기야 공무원연금 개혁에 대해 정부보다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며 이슈를 전환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러한 행보가 대권 도전에서 박 대통령, 나아가 대통령 지지층의 지원을 받는 데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면 오산이다.
미래 권력으로 가는 필요 조건
현재 박 대통령 개인에 대한 지지는 새누리당 내 다른 인물에게 연결되거나 정부에 대한 만족도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당시 신한국당 후보는 한때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고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지원이 있었음에도 김대중 후보에게 석패했다. 자신의 지지층은 결집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플러스알파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 진영 대결로 굳어졌던 2012년 대선과 달리 다음 대선은 박 대통령이나 새누리당 지지층뿐 아니라 중도 성향 유권자에게도 호소력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 중도 성향을 보이는 유권자층은 대체로 40대고, 지지 정당이 없는 무당층이다. 한길리서치가 10월 17~18일 전국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를 보면 여야 차기 대선후보 중 김 대표는 40대와 무당층 지지율이 한자릿수를 벗어나지 못했다(그래프3 참조). 김 대표 자신이 혁신위원장으로 발탁한 김문수 전 경지도지사와 별반 차이가 없다. 외연 확장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다.
전통적인 새누리당 지지층이나 박 대통령 지지층을 넘어서지 못하면 현실 정치에서 대통령을 견제할 수 없다. 개헌 관련 여론조사 결과를 분석해보면 40대가 다른 연령대에 비해 개헌에 대한 관심이 높고 무당층에서 ‘분권형 대통령제’를 선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유리한 측면이 있다면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개헌론을 더 정교하게, 그리고 더 전략적으로 부각할 수는 없었을까. 어쩌면 개헌론 파동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김 대표는 대통령의 언덕을 넘어 중도 평원으로 가야 한다는 미래를 좀 더 빨리 깨닫지 않았을까 싶다.
끝이 시작이다. 지난 대선후보였던 새정치연합 문재인 의원의 정치생명은 선거 패배 직후 꺼질 것 같았지만 여야 대치국면에서 되살아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흔 같은 서해 북방한계선(NLL) 논란은 문 의원에겐 덫 같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정치생명을 연장하는 디딤돌이 됐다.
국민의 호불호가 엇갈리는 박 대통령이 있기에 야권 후보들의 약진이 가능한 것처럼, 김 대표의 대권 도전은 대통령과 충돌한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관건은 김 대표가 미래 권력으로 가는 데 필요한 조건을 얼마나 갖추느냐는 것이다. 서초패왕인 항우에 맞선 유방이 끝까지 정면대결을 고집했다면 대업의 영광은 없었을 것이다. 잔도를 불태우고 첩첩산중으로 들어간 그때 유방의 운명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개헌론으로 발호한 김 대표의 1차 시도는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권 도전의 제대로 된 책략을 얻었다면 좋은 보약이 될 것이다. 개헌론 파동의 끝이 김 대표에게는 대권 도전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