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8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서 여야 간 기업인 증인 채택 합의가 불발되며 개회가 늦어지고 있다.
20일간 들여다봐야 할 피감(被監)기관 672곳. 국회는 우왕좌왕이고 피감기관은 슬며시 웃고 있다. 대한민국 국회의 국정감사(국감) 얘기다. 10월 7~27일 실시하는 2014년 국감 초반부터 ‘부실 논란’에 휘말리고 있다. 양적으로, 질적으로 여러 문제점이 초반부터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국감 일정부터 뒤늦게 확정돼 준비 단계부터 혼선이 일었다. ‘세월호 정국’에서 공전을 거듭하던 국회가 9월 30일에야 세월호 특별법 협상을 타결하고 국감 일정을 확정했기 때문이다. 당초 올해 실시 예정이던 ‘분리국감’도 세월호 정국에 묻혔다.
국감 준비 기간은 엿새지만, 피감 대상은 최대 규모인 672곳이다 보니 의원실마다 요즘 ‘벼락치기 야근’을 반복하고 있다. 한 여당 국회의원 보좌관의 설명.
“그나마 국감 기간이 20일이지만 주말과 공휴일을 제외하면 15일이 채 안 된다. 하루 평균 3∼4곳을 감사해야 하니 지도부와 언론이 관심 갖는 주제만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수박 겉핥기 국감’이 되는 건 당연하다.”
피감기관이 가장 많은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들은 “실제 감사 기간은 12일인데 100개 기관을 감사해야 한다”며 비상이 걸렸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지역구를 오가며 국감 준비를 하느라 잠을 못 자 입안이 다 헐었다”고 했고,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의원은 “고3 수험생도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소연한다.
떠밀리듯 시작한 국감의 후유증
국회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에서는 ‘떠밀리듯 시작한 국감’ 후유증이 벌써부터 나타났다. 증인 채택 문제로 여야가 신경전을 벌이면서 10월 7, 8일 파행을 겪었다. 환노위 야당 의원들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통상임금 관련 노사 갈등, 사내 하청노동자 고용 회피 등),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삼성전자서비스의 다단계 하도급 운영),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황창규 KT 회장 등을 증인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당 의원들은 “개별 사업장 문제를 국회가 개입해 판단해선 안 된다”며 맞받았다. 증인 채택 문제는 당 지도부의 공중전으로 비화해 “필요한 증인 참고인이 무슨 문제냐. 수백 명이라도 불러야 한다”(새정치연합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 “기업인을 증인이나 참고인으로 부르는 것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는 설전으로 이어졌다.
국회 정무위원회에서도 10월 15, 16일로 예정된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국감 증인 채택을 놓고 위원 간 고성과 반말이 터졌다. 새정치연합 강기정 의원이 “오늘 오전까지 (증인 채택을) 하기로 했으면 했어야지. 하기 싫으면 나가라”고 언성을 높이자 새누리당 정우택 정무위원장이 “싸우라고 기회를 드렸는지 알아?” 하고 고함을 질렀다. 회의는 30분 만에 중단됐다.
문제는 이런 모습이 돌발 상황이 아니라 이미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는 점. 시간에 쫓겨 국감을 시작하면 여야가 사전에 논의할 증인 문제 등이 국감이 시작되는 날까지 매듭짓지 못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자 분리국감이 대안으로 마련됐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이들이 바로 여야 국회의원이다.
일부 의원의 ‘코미디 같은 모습’이 국감을 희화화한다는 지적도 있다. 10월 7일 국방위원회 국감에서는 여당 의원들이 야당 의원들을 흉보는 메모가 논란이 됐다. 새정치연합 진성준 의원이 발언하는 도중 새누리당 송영근, 정미경 의원이 ‘쟤는 뭐든지 빼딱!’ ‘이상하게 저기 애들은 다 그래요’라고 적힌 메모를 주고받는 모습이 언론 카메라에 찍힌 것이다. 새누리당 두 의원의 사과로 일단 파행은 비켜갔지만, 국감 현장을 ‘코미디쇼’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피하지는 못했다.
10월 8일 환노위의 고용노동부 국감 도중엔 새누리당 권성동 의원이 휴대전화로 비키니를 입은 금발 외국 여성 사진을 보는 모습이 포착됐다. 권 의원은 “휴대전화로 환노위 관련 기사를 검색하다 잘못 눌러 사진이 뜬 것”이라며 의도적인 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관련 뉴스는 그다음 날까지 ‘가장 많이 본 정치뉴스’에 올랐고, 누리꾼의 비판이 이어졌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대리기사 폭행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새정치민주연합 김현 의원(왼쪽). 10월 6일 국회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회의에서 문희상 비대위원장(가운데)이 발언하고 있다. 이날 회의에서 문 위원장은 김현 의원과 관련해 사과 발언을 했다.
10월 7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국정감사 도중 새누리당 송영근, 정미경 의원의 ‘야당의원 비하 쪽지’가 카메라에 포착돼 언론에 공개됐다.
그러나 정작 김 의원 대신 안전행정위원회(안행위)로 자리를 옮긴 문 비대위원장은 명패가 없어 다시 외통위로 돌아가야 했고 “곧 상임위가 바뀔 상황에서 이곳에 오게 됐다”며 머쓱해했다. 이를 두고 “김현 의원을 외통위의 해외 공간 시찰에 보내 언론 관심을 잠재우려는 의도”라거나 “해당 상임위에 대한 전문성이 없는 의원을 국감 직전 바꾸는 것은 의회가 스스로 행정부 견제를 포기한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를 두고 “그동안 세월호 정국에서 보여준 정치권의 무능함이 국감에서도 이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새정치연합 관계자), “국감은 후반으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져 여러 실수가 나오는데 올해는 처음부터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묵묵히 국감을 준비한 다른 동료의원들까지 우습게 만들 수 있는 만큼 주의해야 한다”(새누리당 관계자)는 반응이 나온다.
다만 ‘정치 자체를 희화화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행정부를 감시, 견제해야 할 국회가 제구실을 못하는 건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국감 부실’을 당연히 여긴다면 결국 피감기관의 무능과 부패 비리를 덮어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정감사를 국감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따지고 보면 이번 국감은 정치권은 물론 민생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상임위별로 정책의 큰 흐름이나 민생과 직결된 사안이 수두룩하다.
당장 국방위원회만 봐도 최근 수면 위로 떠오른 군대 내 가혹행위 문제 등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급변하는 남북관계, 북핵 문제, 미국의 한반도 THAAD(고고도미사일요격체계) 배치 논란, 주변 정세 등도 국방위원들이 면밀히 지켜봐야 할 주제다. 평소 국방 관련 정보를 접하기 어려운 국민으로선 국감을 통해 그나마 ‘알 권리’가 확대되기 때문이다.
국민의 호주머니 사정과 직결되는 사안도 많다. 부동산 규제 완화 방안을 비롯한 각종 경제 법안과 담뱃세 및 지방세 인상안 등 증세 논란, 공무원 연금개혁 및 규제개혁도 핵심 쟁점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1심 무죄 판결로 관심을 끄는 국정원의 대통령선거 개입 의혹 등도 첨예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오른쪽)와 이철우 의원이 10월 8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번 국감에 대해 여야는 ‘민생과 정책’을 한목소리로 강조한다. 새누리당은 ‘민생안정, 국민안전’을, 새정치연합은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을 내세우면서 ‘가짜 민생’이라고 비판해온 각종 경제 정책을 집중 점검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여야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면 국감은 정국 주도권이나 리더십 경쟁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여권의 경우 넓게는 야당과의 ‘포스트 세월호 정국’에서 주도권을 잡고, 좁게는 내부 결속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최근 박 대통령이 ‘개헌 논의 반대’ 견해를 밝히고 ‘집안 단속’에 나선 것은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이에 발맞춰 이완구 원내대표를 비롯한 친박(친박근혜) 의원들이 국감에서 당력을 모아 경제 문제를 집중 부각하면서도 대정부 방패 구실을 할 공산이 크다.
이완구 vs 우윤근 리더십 경쟁도
내부에서는 친박과 친이(친이명박) 세력 간 미묘한 신경전이 감지된다. 친박계 좌장으로 불리는 서청원 최고위원과 박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리는 이정현 최고위원이 사안마다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반면, 친이계 이재오 의원은 박 대통령에 대한 ‘쓴소리’와 ‘개헌전도사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차기 대통령선거 주자로 거론되는 김무성 대표와 김문수 보수혁신특별위원회 위원장의 움직임도 특별하다. 김 대표는 당장 국감이 시작된 10월 8일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추경호 국무조정실장을 당 최고위원 중진의원 연석회의에 불러 2018 평창겨울올림픽 준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행정부를 견제하는 국감 기간에 장관을 불러 국정을 챙기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새정치연합은 ‘국감에서의 야당 존재감 회복과 설욕전’이 시급하다. 새정치연합의 한 중진의원은 “6월 지방선거 패배, 7월 재·보궐선거 참패, 세월호 특별법 협상에서의 주도권 상실 등 잇따른 굴욕적 상황을 어떻게든 국감에서 힘을 모아 극복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당장 야권 지지층이 완전히 우리에게 등을 돌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위기감은 문희상 비대위원장이 국감 시작 전날인 10월 6일 대리기사 폭행사건에 연루된 김현 의원과 관련해 사과한 것에서도 읽힌다. 여론의 질타 속에서도 공식사과를 하지 않다 사건 발생 19일 만에 공식사과를 한 이유도 국감을 앞두고 김 의원 연루 사건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새정치연합의 한 고위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한다.
“세월호 특별법 합의안을 놓고 두 차례 홍역을 치른 마당에 김 의원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 한 번 당이 홍역을 치를 수 있다는 우려가 커 대응이 늦어진 건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대리기사와 시민단체의 고소, 고발로 피의자 신분이 된 김 의원이 경찰청 등을 대상으로 감사를 벌여야 하는 안행위원으로 국감에 임하는 건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여기에 언론이 정부 여당을 견제해야 할 국감보다 김 의원에게만 관심을 갖게 된다면 본말이 전도된 상황을 맞을 수도 있어 문 비대위원장이 사과한 걸로 안다. 그런데 문 비대위원장이 사과하면서도 ‘세월호 아픔을 치유하는 데 온몸을 던진 분’ 같은 사족을 달아 사과가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의문이다.”
이와 함께 10월 9일 공석인 새정치연합 원내대표에 3선의 우윤근 의원(전남 광양·구례)이 당선하면서 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와의 국감 리더십 경쟁도 관전 포인트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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