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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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세론’ 확고부동한가

선거로 검증 ‘이회창 대세론’보다 훨씬 강력…비전과 정책 제시가 가장 큰 과제

  •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입력2012-04-30 09: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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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세론’ 확고부동한가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과 당선 의원, 당직자 등이 4·11 총선 다음 날인 4월 12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참배하고 있다.

    단도직입으로 묻자.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가. 답은 대세다. 후보별 대선후보 지지율을 보면 박 비대위원장은 압도적으로 1위다. 한때 ‘안철수 바람’이 몰아칠 때 잠시 1위를 내준 적은 있지만 그의 위세는 거의 4년 동안 이어졌다. 한국리서치가 지난 총선 직후인 4월 12일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박 비대위원장은 36.5%로 2위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20.5%)을 16.0%포인트 앞섰다.

    관점을 바꾸면 다른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문자 그대로 대세라고 하면 누구와 붙어도 승리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일대일 대결구도가 중요하다. 특히 올 12월 대선은 양자 맞대결 구도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국리서치의 같은 조사에서 박 비대위원장 대 안 원장은 43.4% 대 44.4%의 호각세를 보였다. 이 측면에서 보면 대세론은 없다. 대세론을 말하기조차 쑥스럽다.

    누구와 붙어도 승리 장담?

    흔히 대세론이라 하면 2002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거론한다. 당시 이회창 후보는 사실상 대통령이라고 불릴 만큼 막강한 입지를 구축했다. 한국갤럽의 2001년 12월 조사에 따르면,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24.1%에 그쳤다. 현재의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 30%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국갤럽의 같은 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는 45.4%의 지지율을 얻어 34.8%의 이인제 후보를 멀찌감치 앞섰다. 노무현 후보와의 대결에서는 47.4% 대 31.3%로 더 크게 앞섰다.

    그보다 두 달쯤 뒤인 2002년 2월 27일 박근혜 의원이 탈당하는 등 자잘한 파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은 이회창 후보가 확실히 장악했다. 족탈불급(足脫不及)이라는 표현 그대로 아무도 그에게 도전할 수 없는 철옹성을 구축했다. 게다가 1997년 대선에서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악재(아들의 병역비리 등)가 더는 대중적 소구력을 발휘하기도 어려웠다. 영남이 단결해 이회창 후보를 지지한 데다, 1997년 대선에서의 이인제 후보처럼 영남 일부를 잠식할 ‘위험분자’도 없었고, 충청이 그의 고향이었으니 DJP(김대중-김종필) 같은 지역연합의 공포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니 여론조사와 상관없이 이회창 후보가 대세를 형성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한나라당의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현 정권의 거듭된 실정으로 집권 가능성은 높아졌지만, 이회창 총재가 주요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고 국가경영의 비전을 분명히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다.” 결국 이 말은 맞아떨어졌다. 누군가는 또 다른 점을 지적했다. 20, 30대 젊은 층의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점을 꼬집은 것. 이쯤 되면 분위기상으로는 대세를 구가하고 있을지 몰라도 내용적으로 상당히 취약하다고 보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요컨대 이회창 대세론은 실체가 없었다.

    2012년 4월 11일 총선 뒤에 ‘박근혜 대세론’이 다시 등장했다. 이전에도 이런 평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상당히 그럴싸하게 들린다. 대세론이 급속히 유포된 배경에는 불리한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 2011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시 한나라당 후보는 7.2%포인트 차이로 졌다. 박 비대위원장이 지원유세에 나섰음에도 어쩔 수 없는 패배였다. 게다가 2012년 벽두에 정당 지지율에서 새누리당은 민주통합당에 밀렸다. 이러니 임박한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패배하리라고 예상하는 것은 당연했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새누리당이 독자 과반수 의석을 얻었다. 선거전에서 민주통합당이 어리석은 실수나 믿기 어려운 무능을 보였지만, 그럼에도 새누리당이 제1당이 되는 것은 몰라도 과반의석은 얻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을 보기 좋게 비웃었다. 이런 반전 드라마에 심증을 더한 것은 부산·경남에서의 승부다. 이 지역은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이상기류를 보이기 시작했고, 2010년 6월 부산시장 선거에서 야권 김정길 후보가 44.6%의 득표율을 올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차에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대권주자로 부상하면서 부산·경남에서 새누리당의 정치적 독점구도가 무너지는 것은 충분히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였다.

    20, 30대엔 ‘캐릭터’ 안 먹혀

    ‘박근혜 대세론’ 확고부동한가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왼쪽에서 세 번째)와 서청원 대표(왼쪽에서 네 번째)가 2002년 9월 10일 중앙당사에서 당직자들과 함께 ‘대선 D-100일 카운트다운’ 및 국민화합 캐리커처 벽화 제막식을 갖고 박수를 치고 있다.

    이런 흐름을 박 비대위원장이 반전시킨 것이다. 전체 40석 가운데 단 4석을 내주고 나머지를 석권했다. 친여당 성향의 무소속을 제외하면 사실상 야권에 3석을 내준 것이다. 무명의 손수조 후보를 띄워 문재인 상임고문의 당선 여부를 우스운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한편, 새누리당의 변화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낙천한 김무성 의원 등을 주저앉혀 여권 분열을 막았다. 그렇게 해서 부산·경남의 이탈을 막아냈으니 대단한 성과를 낸 것임은 틀림없다.

    충청은 또 어떤가. 지난 총선에서 당시 한나라당은 전체 24석 가운데 1석을 얻는 데 그쳤다. 17대 총선에서도 역시 1석을 거뒀다. 그런데 이번에는 15석 가운데 12석을 얻었다. 정당 득표율에서도 대전, 충북, 충남에서 각각 34.3%, 43.8%, 36.6%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 총선에서 얻었던 24.8%, 34.0%, 27.1%에 비하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이다. 이 수치는 여권이 압도적 우위, 즉 대세 속에서 치렀던 지난 17대 대선에서의 득표율을 거의 회복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번 총선 성적표만 들여다보면 박 비대위원장의 힘은 분명히 확인된다. 특히 선거를 통해 검증된 힘이니 분위기만으로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데 이를 대세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이회창 대세론’에 비하면 훨씬 강고하고 넓어 보인다. 충청과 강원을 회복했고 부산·경남의 이탈을 저지했다. 최대의 부담인 ‘MB(이명박 대통령) 스트레스’도 상당 부분 털어냈다. 이완됐던 보수 결집도 강화했다. 일부 도전이 있지만 1인 체제라 해도 무방할 만큼 당내 질서도 안정됐다. 그럼에도 아직 불안하게 보이는 요인이 없지 않다.

    김형태, 문대성 당선자를 처리하는 일과 관련해 2002년 이회창 후보처럼 인의 장막에 갇혀 현실 감각을 잃은 징후도 보이며, 권력투쟁 조짐도 어느 정도 나타난다. 박 비대위원장이 지닌 가장 큰 위협은 이번 선거에서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지적대로 그의 소구점은 정책이 아니라 캐릭터였다.

    누가 뭐래도 시대 흐름을 타지 못하면 대통령이 되지 못한다. 자기 비전과 정책이 그 시대의 보통 사람이 원하는 바와 상당한 불일치를 보였던 것이 2002년 이회창 후보의 아킬레스건이었다. 박 비대위원장도 그런 대목이 있다. 20, 30대 지지율에서 약세를 면치 못하는 게 대표적이다. 보수층 일부의 이의 제기도 이어진다. 이 한계를 어떻게 보완하느냐가 박 비대위원장의 과제인 셈이다. 아직은 대세가 아니라 준(準)대세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문제는 박근혜 비대위원장 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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