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당 내 보수성향 모임으로는 공직자 출신 의원 모임인 한백회(회장 유흥수)와 상록회(회장 이상배), ‘바른 통일과 튼튼한 안보를 생각하는 국회의원 모임’, 중진의원 모임 등이 외부에 알려져 있다. 이중 ‘바른 통일 모임(회원 수 51명)’과 중진의원 모임(회원 수 31명)이 정치현안에 대한 보수 의원들의 입장을 밝히는 통로가 되고 있다. 두 모임 모두 김용갑 의원이 대표를 맡고 있으며 회원들도 중복 가입해 있다. 바른 통일 모임은 ‘공동명의의 성명발표’, 중진의원 모임은 ‘성명발표+회원간 직접접촉’으로 역할이 나뉘어 있다.
2001년 4월 결성된 중진의원 모임은 6월 공식적 만남을 가진 이래 10월 현재까지 한 차례 골프회동을 포함해 4차례 모임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회창 총재가 회합을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성된 당내 첫 계보 성격의 모임이다.
당 지도부가 쌀 200만 섬 북한지원 방침을 밝히자 중진의원 모임은 의원회관에서 1시간30분 동안 난상토론을 벌여 반대 입장을 결집하는 한편, 당 지도부를 여당 대하듯 강도 높게 성토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이에 당 지도부가 당황하고 결국 쌀 지원 방침을 보류함으로써 이 문제는 정리됐다. 이 모임 소속의 최병렬 부총재와 김용갑 의원, 비회원이지만 모임에 자주 참석하는 강재섭 부총재는 자민련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이 모임 소속 중진인사들은 이총재와는 다른 독자적 정국해법으로, 최근 당내에서 동조 의견을 상당 부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색깔론 공방이 영수회담이 있은 지 하루 만에 터져나온 것을 두고 정치권에선 두 가지 해석이 나온다. 첫째는 이회창 총재의 당 장악력에 의문을 갖는 시각이다. 이총재가 냉전수구 이미지를 탈피하고 국가지도자로 각인되기 위해 쌀 지원 방침을 밝히고 영수회담을 수용했는데 당내 ‘골수 보수’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해 너무 튀는 발언을 했고 이총재측이 이들의 ‘고저장단’을 조절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이번 발언은 당 지도부의 묵시적 동의 아래 이뤄졌다는 해석이 있다. 현 정권의 대북정책에 비판여론이 높다고 본 지도부가 민심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한편 JP-YS 연대에 보수층이 결집될 가능성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 보수파의 강경발언을 용인했다는 논리다. 당 지도부가 안의원의 원고를 사전 스크린해 놓고도 그냥 ‘GO’ 사인을 보낸 부분이 주요 근거다. 이총재가 발언 문제에 대해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 역시 ‘보수층 결집’과 ‘총재 이미지 제고’ 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는 것.
한나라당 내 개혁 세력의 ‘침묵’도 이상한 대목이다. 안·김의원의 발언 수위로 봤을 땐 당내 개혁파 의원들 사이에서 맹비난이 나올 법한데 10월15일 현재까지 당에선 아무런 역풍이 불고 있지 않다. 결론적으로 이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의 어느 경우라도 이번 색깔론 공방은 보수의원 세력의 전과며 이들의 격상된 위상을 확인해 주는 일이 된다는 평이다. 한나라당 한 의원은 “중진의원 모임이 가시적 형태를 잡아가면서 공식 출범 4개월 만에 당내 파워 그룹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들이 ‘정치적 결사체’로 진화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한 고위 당직자는 “JP를 포용하라고 하면서 개혁파 의원에겐 당을 떠나라고 요구하는 등 김용갑 의원을 중심으로 한 일부 보수파 의원들은 당의 ‘합리적 보수’ 노선에 역행하는 측면이 있다. 이번 발언들도 원색적이고 단편적”이라고 평가절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