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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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밖에 대안 없는 것 안다 그러나 장성택이 뭐란 말이냐, 이렇게 사라질 순 없다”

오극렬의 눈으로 본 2012년 평양 그리고 김정은 시대

  •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12-01-02 09: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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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그를 주목한다. 독기마저 느껴지던 젊은 시절의 표정이 어느새 사그라진 여든하나의 노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이후 평양의 권력 변동과 정치적 불안정 위험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모든 시선은 이제 옅은 색안경 너머 그의 작은 눈동자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들여다보려 애쓴다. 바로 인민군의 숨은 실력자로 손꼽혀온 오극렬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다.

    1931년 만주 지린성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그는 김일성 주석이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벌이던 무렵 부대원이던 오중성(오종흠으로도 알려졌다)의 외아들이자, 인민군의 귀감으로 칭송받는 오중흡의 5촌 조카다. 김정일 위원장이 1996년부터 전투부대 혁신운동을 벌이며 모범부대에 ‘오중흡 7연대’라는 칭호를 하사해왔다는 사실은 북한군 내에서 그의 가문이 상징하는 바를 한눈에 보여준다.

    만경대혁명학원과 김일성종합대를 졸업한 그가 소련 프룬제군사대학 유학을 마치고 인민군 중장계급으로 공군사령관에 임명된 것이 1967년,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36세였다. 1980년대 후반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과의 불화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던 짧은 시기를 제외하면, 이후 그는 무려 40년 이상을 군부 핵심에 머물렀다.

    그러나 김정은 후계체제 구축 과정에서 그의 위상은 급속히 추락했다. 1990년대 중반 이래 10여 년간 인민군 수뇌부를 구성했던 선군시대의 최고지휘관들은 허울뿐인 자리로 밀려나거나 공식석상에서 사라졌고, 그 자리는 김정은 시대를 담당할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졌다. 이렇듯 최근 2~3년간 진행된 급격한 권력엘리트 교체 광풍은 오극렬을 주목하게 만드는 첫 번째 이유다. 어쩌면 그 자신이나 그가 대표하는 군부 원로그룹, 혹은 그 측근세력 일각에서 새로 형성된 권력지도를 납득하지 못하고 ‘딴 마음’을 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북한군 인사변동을 오랜 기간 관찰해온 전문가들의 분석과 전·현직 군 정보당국자들의 견해를 기반으로, 최근 평양에서 벌어진 일련의 권력 재편과 오극렬의 오늘을 그의 시각에서 팩션(faction) 형식으로 구성했다. 등장인물과 그들 사이의 관계는 모두 사실과 정보에 근거하며, 특히 해설 부분에서 제시한 자료와 분석은 모두 실제의 것이지만, 시나리오 부분에서 이들 사이에 벌어진 것으로 다룬 사건과 대화는 가상이다.



    “정은밖에 대안 없는 것 안다 그러나 장성택이 뭐란 말이냐, 이렇게 사라질 순 없다”

    왼쪽부터 1986년 인민군 총참모장 시절, 1995년과 2002년 노동당 작전부장 시절, 2009년 2월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임명 직후 오극렬의 모습.

    #1. 그의 길과 나의 길

    날이 궂었다. 위원장의 유해를 실은 검은색 영구차가 더딘 눈발을 헤치며 광장으로 들어섰다. 영구차 위로 손을 올리는 정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걸쳐 입은 그의 검은색 양모 코트가 유난히도 커 보였다. 그렇게,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것을 주석단에 선 그는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자신의 시대도 끝났다는 것 역시 더는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시대의 마지막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 날씨다.

    억지로 움직이는 듯 천천히 이동하는 영구차 주변으로 여덟 명이 따라 걸었다. 그러나 거기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위원장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의식에 자신만큼 어울리는 사람이 없다는 건 공화국의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문법이었다.

    3년 전, 침대에 기대앉은 위원장의 목소리는 유난히 낮았다. 뇌졸중 발작으로 사경을 헤매다 돌아온 위원장이 처음으로 그를 불러 내린 말이 “정은을 후계로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과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정은은 나쁜 카드가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남은 위험했고, 그 위에는 여전히 장성택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정철 시대를 만들겠다고 뛰어다닌 이용철과 이제강, 그들과 부화뇌동했던 정하철의 위세도 위협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이제 20대 중반을 넘긴 정은이 정말로 공화국의 미래를 책임질 만한 자질을 갖췄는지는 위원장에게도, 그에게도, 평양의 다른 누구에게도 중요치 않았다. 위원장의 목숨이 언제 꺼질지 모르는 이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겨누지 않고도 공존할 수 있는 길은 정은밖에 없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다. 적어도 그때의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잘못 판단했던 것일까.’ 정은의 뒤에 붙어선 장성택을 바라보며 그의 생각은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아주 가끔이지만, 그는 장성택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다른 무엇보다 경제라며, 먹고사는 문제라며, ‘고난의 행군’을 다시 겪을 수는 없지 않느냐며 울분을 토하는 장성택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선택일 수 있는지, 장성택은 한 번도 말한 적 없었다. 공화국을 둘러싼 무수한 적이 그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 장성택은 말하지 않았다. 그걸 말할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가늘어졌던 눈발이 다시 굵어졌다. 영구차는 광장을 빠져나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추위를 버텨가며 서 있는 동안 얼어붙은 다리를 풀면서, 그는 지나가버린 자신의 젊음을 원망했다. 이제 그의 시간은 끝났다. 선군의 시간도 끝났다. 달러벌이와 베이징의 의중만을 신경 쓰며 살아야 하는 비루한 사대(事大)가 공화국의 미래가 된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미래일 수 있는가. 그런 나라가 과연 공화국일 수 있는가.’ 그는 뻗어나가는 생각을 억지로 다잡았다.

    1977년 인민군 부총참모장, 79년 총참모장에 오른 이후 10여 년간 오극렬은 사실상 지금의 북한군을 설계해냈다. 극심해지는 남북 간 경제격차에도 엄청난 자원을 쏟아부어 전투기 등 최신예 전력을 도입하고 전방사단의 기계화와 대규모 특수전 병력 양성을 강도 높게 추진한 것이 바로 그의 작품이었다. 이러한 업적이 인민군 내에서 그의 위상을 절대화해준 원동력이었음은 불문가지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한 선군정치와 함께 군부의 위상이 급상승하면서 그의 영향력 또한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공식적으로는 당 작전부장으로 대남(對南) 비정규 군사행동을 총괄했고, 비공식적으로는 이후 구성된 인민군 수뇌부의 인선과 발탁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김영춘, 현철해, 김명국, 이명수 등 2000년대 중반까지 평양 권력의 핵심을 틀어쥐었던 이른바 ‘군사파’ 인물은 모두 그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큰 틀에서 보면 이러한 군부와 가장 뚜렷한 대척점을 형성한 인물은 김 위원장의 매제인 장성택 현 당 행정부장이다. 군부와 민간 당료를 각각 대표하는 오극렬과 장성택은 다양한 층위에서 대립점이 두드러진다. 소련 군사 아카데미에 유학해 모스크바와 관계가 깊었던 오극렬과 달리 장성택은 친중파(親中派)로 알려졌으며, 군사 분야의 실력자인 오극렬이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군사력 강화에 정책초점을 맞췄다면 경제 분야에 조예가 깊은 장성택은 남측과의 관계개선을 통해서라도 외화벌이와 제한적인 특구정책으로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는 견해에 가까웠다. 거칠게 말하자면, 1990년대 이후 평양이 보인 핵실험과 개성공단이라는 양 극단의 행보를 각각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이들인 셈이다. 북한의 미래를 놓고 두 세력이 펼친 거대한 노선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김정일 시대는 오극렬과 군부의 영향력이 훨씬 강한 시기였다. 2001년 7·1경제관리개선조치로 도입됐던 시장경제적 요소가 2005년 배급제로 환원되는 등 민간 엘리트 중심의 경제우선정책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수포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일하던 장성택이 한때 실각했던 것 역시 이러한 선군정치의 강력한 지배권과 관련 깊다는 시각이 있다. 2006년 권좌에 복귀한 장성택이 외화벌이의 돈줄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반격에 나섰지만, 2008년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군부 영향력이 오히려 강화되는 징후마저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직후 본격화한 후계체제 구축 과정과 함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2.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누가 봐도 모든 일은 한 가지 방향으로 향했다. 그의 입지를 줄이는 것, 그것뿐이었다. 위원장이 정은으로의 후계를 공식화한 직후 이영호가 총참모장에 올랐고, 그가 맡던 작전부는 정찰총국으로 통합돼 김영철이 그 책임자에 임명됐다. 이영호가 누구인가, 김영철은 또 누구인가. 이들의 공통점은 그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정은이나 그의 어머니 고영희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인물이라는 것뿐이었다. ‘후계자 정은의 세상’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현실로 입증되고 있었다.

    “샛별대장의 대학 졸업논문을 어쭙잖게 지도했다는 이유만으로 인민군을 대표하는 얼굴이 되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군사협상 테이블의 얼굴 마담에 불과했던 자를 비정규전 총책임자로 임명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나라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120만 장병을 맡기는 일을 두고만 보실 겁니까.”

    사방을 에워싼 감시의 눈을 피해 눈이 허리까지 쌓인 산길을 뚫고 달려온 10군단장의 목소리는 평정을 잃은 듯 부박하게 흔들렸다. 인민군의 대의는 목숨보다 소중하다며 그가 내뱉는 문장 속 글자가 표창처럼 자기 심장에 와 박히는 게 똑똑히 느껴졌다. 그 순간, 그의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타고 올라왔다.

    나에게 어쩌란 말인가. 그래, 내 판단이 틀렸다고 하자. 정은을 매개로 모두가 공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던 나의 기대는 어리석은 것이었다고 하자.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정말 주석궁에 탱크라도 몰고 들어가자는 말인가. 순진한 척하지 마라. 너의 마음이 진정으로 공화국과 혁명무력의 대의를 말하는 것이냐. 이영호와 김영철의 시대에 너의 오늘이 가루처럼 흩어져버릴 수밖에 없음을 알기에 이러는 것 아니냐.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말을 되뇌며, 그는 머릿속으로 흘러가는 한 자락 영상을 들여다봤다. 금수산기념궁전을 배경으로 촬영한 조선노동당 대표자회 기념사진. 이영호는 위원장과 정은 사이에 섰다. 장성택은 위원장의 바로 오른편 뒤였다. 위원장 얼굴은 내내 어두웠다. 아니, 어쩌면 그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대표자회가 진행되는 짧지 않은 시간, 위원장은 한 번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인민군의 대의 따위는 상관하지 않을 수 있음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긴다는 뜻이었을까. 그 역시 공화국 지도자이기 전에 한 사람의 아버지였다. 중요한 것은 아들을 지켜줄 사람을 하나라도 빨리 권좌에 올려놓는 것뿐이었다.

    마지막 날의 마지막 자리, 일일이 악수를 나누던 위원장이 문득 그를 향해 돌아섰다. 노인 특유의 물기 어린 눈동자는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임자의 시대만 끝난 게 아니오. 내 시대도 끝난 것이오. 이제 우리는 같이 사라져야 할 운명인 게요.’

    흔히 ‘오극렬 라인’으로 분류되던 군 수뇌부는 2009년 초 평양이 내부적으로 후계체제를 확정하면서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한다. 이영호 총참모장과 김영철 정찰총국장 임명으로 대표되는 세대교체의 광풍은 인민군 창군 이래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격적으로 진행됐다. 이후 2010년 6월 최고인민회의와 9월 당대표자회를 거치면서 김정은 세대를 이끌어갈 인물로 발탁된 ‘신군부’의 위상은 하루가 다르게 공고해졌다.

    그러나 야전부대 곳곳에 남은 ‘오극렬의 사람들’을 교체하는 작업을 완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김 위원장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고, 이는 향후 북한체제의 불안정성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김정은과의 개인적인 인연을 바탕으로 지휘권을 장악하기에 이른 신군부의 출세를 지켜보며, 몰락을 코앞에 둔 이들이 불만을 품게 될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북한 군부에서 파열음이 불거진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군부 일각에서 어떤 식으로든 무력을 동원한 권력교체를 기획한다면 오극렬은 반드시 포섭해야 할 대상 1호다. 김일성 가계의 로열패밀리를 제외하면 오극렬만큼 인민군 전체에 걸쳐 정치적 명분을 담보할 수 있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 뒤집어 말하자면 김정은 후계체제에 도전하려는 모든 무력 시도는 오극렬의 지지나 묵인 없이는 성공하기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정은 후계를 공식화한 2010년 9월 당대표자회 이후에도 그가 장성택과 같은 국방위 부위원장이라는 직함으로 깍듯한 예우를 받는 것은 이를 고려한 듯하다. 이영호에게 총참모장 자리를 물려주고 인민무력부장으로 옮겨간 김영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병력을 동원하거나 정책을 결정할 핵심 권한은 이미 당중앙군사위원회로 옮겨갔지만, 김정일 시대의 ‘유산’에 해당하는 형식상 최고기구의 최고직위를 내주는 방식이다. 당초 발표된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서 서열 29위였던 오극렬을 12월 23일 김정은의 참배 당시 11번째로 호칭한 배려도 새로 권력을 맡은 인사들이 그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의전상 예우가 신권력에 대한 지분 참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향후 김정은 체제가 안정화하는 속도에 따라 그마저 급속도로 줄어들 공산이 커 보인다.

    #3. 저 빛나는 계급장

    “정은밖에 대안 없는 것 안다 그러나 장성택이 뭐란 말이냐, 이렇게 사라질 순 없다”

    북한 조선중앙TV가 2011년 12월 25일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왼쪽)이 대장 군복(네모 안이 대장 계급장)을 입고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하는 모습을 보도했다. 군복을 입은 장 부위원장의 모습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황색 인민군 정복을 차려입고 참배장에 나타난 인물은 분명 장성택이었다. 어깨 위에서 빛나는 저 찬란한 네 개의 별.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군에 몸담은 적이 없었던 장성택에게 대장 계급을 부여한다는 것은 항일 빨치산 시절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군의 혁명정신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더욱이 자신에게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만인 앞에 군복을 입고 나타난 저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단 말인가.

    모든 것을 참아왔다. 공화국을 흔들림 없이 지켜내려면, 혁명의 가계가 대를 이어 빛날 수 있다면, 그 어떤 수모도 감수할 수 있다고 자신을 달래왔다. 그러나 장성택이 뭐란 말인가. 군 경력 없이 계급장을 다는 것은 오로지 ‘백두산 혈통’에게만 허락된 일이었다. 곁가지에 불과한 장성택이 이를 단번에 짓밟아버렸다는 건 스스로 권력이 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장성택과 나의 길이 다르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중국과의 경제협력으로 공화국의 새로운 미래를 열겠다는 장성택의 꿈이 새 시대에 더 걸맞은 것이라면, 그 역시 수긍하고 돌아설 용의가 있다. 그러나 그의 길이 만약 혁명의 가계를 뛰어넘는 것이라면? 그가 후계자를 넘어서는 권력의 자리에 오르려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위원장이 만들고자 했던 공화국인가. 그것이 내가 나의 온 인생을 바쳐 곧게 세우려고 충심을 다했던 바로 그 나라인가. 내가 장성택의 나라와 그의 군대를 만들려고 수많은 동지의 피를 배반해가며 그 모든 권력싸움의 질곡을 넘어왔단 말인가.

    분노에 찬 그의 눈썹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급한 후계체제 구축 과정에서 배태된 불만이 인민군 일각의 ‘거사’로 이어질 것이라는 시나리오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가장 큰 약점은 바로 평생을 김 위원장을 위해 바쳐온 오극렬 본인의 충성심이다. 급속히 위축되는 자신의 위상과 측근인사의 숙청에 대한 불안감이라는 사적인 동기만으로 그가 김 위원장 본인이 세운 후계자를 배신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남은 가능성은 장성택 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권력체계가 혁명의 전통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는 경우다. 극단적으로 말해 겉으로는 김정은을 허수아비로 내세우고 실제로는 당 관료와 신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연합이 권력을 접수하게 된다면 오극렬도 ‘거사의 정통성’을 수긍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흡사 수양대군으로부터 단종을 보호하려 나서는 김종서의 명분인 셈이다.

    새로운 후계체제 구축 과정을 설계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김정일 위원장이었고, 그는 이해관계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각 권력엘리트 그룹이 김정은 체제를 위해 협력하도록 만드는 노력을 마지막 순간까지 경주했다. 문제는 평양의 권력엘리트들이 이러한 공존에 익숙지 않다는 사실이고, 균형추 구실을 해야 할 김 위원장이 갑작스레 사망했다는 사실이며, 김정은은 이를 대체할 만한 역량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탄탄하기 짝이 없는 이 명분과 힘의 균형상태가 어쩌면 아주 작은 상처로도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는 불길한 전망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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