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가운데)이 3월 20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을 설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진성준 정무기획비서관, 조 수석, 김형연 법무비서관.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도 그럴 것이란 우려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달랐다. 집권 초기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개헌 의지를 내비쳤다. 지난해 5월 19일, 대통령 당선 직후 여야 5당 원내대표와 가진 청와대 회동에서 문 대통령은 이렇게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연히 개헌한다. 공약은 지킨다. 약속에 대해 강박관념이 있다. 개헌은 국민주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 정치권 논의만이 아니라 국민 의견을 담고, 국회가 그런 일을 해달라.”
약속에 대한 강박+개인적 사명감
이후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도, 올해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2018년 전국동시지방선거(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 공약 이행을 거듭 확인했다.본인 말대로, 약속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일지도 모른다. 촛불혁명의 힘으로 집권한 대통령으로서 국민 여망을 외면하기 어려운 것도 이유일 테다. 아울러 민주화운동에 오랫동안 참여한 경험에 따른 개인적 사명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진보정권 장기 집권의 기초를 닦고 싶은 욕구도 없지 않을 테다. 마지막으로 개헌 이슈를 선점하면 지방선거에서 유리한 구도를 만들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이유였다면, 문 대통령은 선거 천재다. 실제로 최근 그런 구도가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홍준표 대표는 왜 개헌 연기론을 들고 나왔을까. 그가 지난해 9월 29일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표면적 이유는 이렇다. “개헌은 국가체제를 완전히 바꾸는 것으로 선거와 같은 날 하면 휩쓸려 투표하게 돼 적절하지 않다.”
개헌이 2018년 지방선거에서 주요 이슈로 부각되면 자유한국당이 제기하려는 다른 이슈가 묻힐 수도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과거에도 자주 등장한 개헌 블랙홀론이다. 그런데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 실시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높은 상황에서 연기를 주장하는 것은 결국 딴죽 걸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칫 호헌세력으로 몰려 역풍을 맞을지 모른다는 자각이 든 뒤에야 비로소 자유한국당은 개헌 논의 참여로 전략을 수정했다. 때늦었지만 올바른 궤도 수정이었다.
개헌 논의에 들어간 이후 자유한국당이 들고 나온 것은 제왕적 대통령제 폐해 극복 차원의 권력구조 개편이다. 정부가 전면적인 헌법 조문 개정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구조 개편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문 대통령이 대통령 4년 중임제를 선호한다 말하고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가 정부 개헌안으로 대통령 4년 연임제를 준비하는 사이 총리를 국회에서 선출하는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안을 만들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또다시 개헌 연기론을 부활시켰다. 6월까지 국회에서 여야가 개헌안에 합의한 뒤 9월 이전에 국민투표를 실시하자는 방안이다. 재차 연기론을 들고 나오면서 자유한국당의 진의는 역시 따로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자유한국당은 지방선거를 정권심판론으로 끌고 가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좌파 프레임도 적극 제기 중이다. 좌파가 나라를 말아먹는 중이니 선거로 심판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 프레임을 안보에도, 경제에도 적용하고 있다. 홍 대표는 2월 24일 ‘천안함 폭침 주범 김영철 방한 저지를 위한 현장 의원총회’에서 청와대 주사파들의 국정농단으로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고 지적했다. 3월 11일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페이스북을 통해 좌파 경제학자가 청와대에 앉아 패망한 소득주도성장론을 주창하는 바람에 나라 경제가 거덜 났다고 비난했다.
그 연장선에서 최근에는 개헌에 좌파 프레임을 강하게 거는 중이다. 1월 10일 충남도당·세종시당 신년인사회에서 좌파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헌법을 개정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한 게 시작이다.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의 정부 개헌안이 나온 뒤에는 아예 내용 하나하나에 시비를 걸고 있다. 자유한국당이 특히 문제 삼는 것은 ①노동권 강화 ②경제 민주화 ③토지 공개념 ④지방분권 강화다.
5+8=13년 장기 집권설
3월 20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자유한국당 당사에서 열린 6·13 지방선거 총괄기획단 전체회의에서 홍준표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개헌 연기를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정부 개헌안에 좌파 프레임을 씌우는 의도는 뭘까. 양면전략이다. 개헌 이슈에 끌려 다니지 않으면서 오히려 역으로 공세를 펴는 소재로 삼겠다는 것이다. 성공적일까.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아닌 것 같다.
국회의장실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해 12월 21일부터 이틀간 실시한 여론조사(국내 거주 성인 남녀 1000명,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 결과를 보면 ‘지방선거 때 개헌안 국민투표 동시 실시’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82.5%, 반대는 14.2%였다. 한국갤럽이 1월 2~4일 전국 성인 100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에 따르면 ‘올해 6·13 지방선거일에 현행 대통령제를 바꾸는 개헌 국민투표를 같이 시행하자’는 항목에 65%가 ‘찬성’, 24%가 ‘반대’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3월 16〜17일 이틀간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남녀 1041명을 대상으로 자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지방선거와 동시 진행’(49.1%) 의견이 ‘지방선거 이후로 미루자’(43.4%)는 의견보다 많았다. 같은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9%는 ‘야당이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한다면 정부가 직접 개헌안을 발의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기도 했다.
자유한국당 일각에서는 이른바 ‘13년 장기 집권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자유한국당 정태옥 대변인은 3월 13일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현 정국의 상황으로 봤을 때 문재인 대통령이 5년 집권을 하고 난 다음 8년의 연속집권이 가능하기 때문에 13년 민주당 연속집권의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고 본다.” 문 대통령이 현행 임기를 마친 뒤 개정 헌법 하에서 두 차례 연속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13년간 집권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현행 헌법 제128조 2항은 ‘대통령의 임기연장 또는 중임변경을 위한 헌법개정은 그 헌법개정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효력이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재선 도전이 불가능하다. 다만 개정 헌법안에 예외 규정을 만든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자유한국당은 보는 것 같다.
이 때문에 홍 대표와 자유한국당이 개헌 연기론을 주장하는 것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이 또한 계산 착오다. 설령 그런 의도를 가졌다 해도, 문 대통령이 차기 대선에서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다. 문 대통령 지지율이 그때까지 고공행진을 이어갈지, 의외의 악재로 추락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임기 말 레임덕이 닥치면서 야심적으로 추진하던 각종 공약사업에 차질이 생기면 자유한국당이 반사이익으로 차기 대권을 거머쥘 수도 있다. 미래 일을 예단해 현재 가능성조차 차단한다면 그야말로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 아닐 수 없다.
“개헌 투표 참여하면 제명하겠다”
문재인 대통령이 3월 7일 청와대 본관에서 여야 5당 대표와 오찬회동을 갖고 있다. 대북특사단의 방북 결과를 설명한 이날 회동에는 정의당 이정미 대표, 바른미래당 유승민 공동대표,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 민주평화당 조배숙 대표(왼쪽부터)가 참석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를 하지 않아도 손해 볼 것이 없다. 문 대통령은 집권 이후 기회가 올 때마다 개헌 의지를 내비침으로써 명분을 쌓아왔다. 국회 논의를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정부 개헌안까지 내놓았다. 국민에게 할 도리는 다한 것이다. 그래서 자유한국당 반대로 개헌안이 부결되더라도 문 대통령에게 비난이 쏟아질 일은 없다. 오히려 공약을 지키려 노력한 문 대통령의 발목을 잡았다는 이유로 자유한국당이 모든 비난을 떠안을 개연성이 높아졌다.
홍 대표는 3월 20일 자유한국당 6·13 지방선거 총괄기획단 전체회의에서 이렇게 배수진까지 쳤다. “개헌 투표를 하게 되면 본회의장에 들어가는 의원을 제명 처리하겠다.” 이 발언을 자신감의 발로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쫓기는 심정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이 발의한 정부 개헌안 표결에서 자유한국당이 보이콧을 통해 부결시킬 수는 있지만, 그 후 역풍을 맞아 지방선거 참패로 이어진다면 홍 대표는 책임론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반란표가 나와 가결되더라도 당내에서는 지도력 부재로 공격받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홍 대표의 개헌 지연론은 당은 물론, 스스로에게도 자충수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