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몸담고 있는 학과에서 두번째 졸업생을 배출했다. 지난해에 비해 많이 나빠진 경제 상황 속에서도 대부분의 졸업생들이 일자리를 얻었지만 아직 상당수가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용케 직장을 구한 제자들을 보면 표정도 환하고 목소리도 활기차 보이지만 아직 직장을 얻지 못한 친구들은 왠지 힘이 없어 보여 안타깝기 그지없고 제자들에게 변변한 직장 하나 마련해 주지 못하는 무능한 선생이란 자책감이 들기도 한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는 입시 전쟁에 목을 매며 10대의 빛나는 청춘을 허비하고 대학에서는 다시 취업을 위해 전전긍긍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이 나라에서 대학 교육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회의하게 된다.
서울대학교를 정점으로 촘촘히 짜여 있는 먹이사슬 같은 학벌 구조 속에서 비일류대 출신들이 갖는 열패감은 대학문을 나서는 순간 아주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강의실에서 늘 학벌 구조의 폐해를 강하게 비판하며 그런 당치 않은 현실에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기를 당부해 왔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벽 앞에서 그런 주체성이 과연 그들에게 얼마나 현실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더욱 암담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문제가 단순히 경제 불황의 일시적 결과가 아니라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것이며 가면 갈수록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기술이 발전하고 산업이 고도화할수록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굴뚝산업이 퇴조하고 지식기반 산업 중심으로 재편된다는 이른바 신경제의 핵심은 인적 자원의 유동성을 높임으로써 경제적 효율을 달성한다는 데 있다. 그 결과는 구조조정이란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된 사실상의 무자비한 인원 감축이고 대량 해고이며 실업의 일상화다.
일자리는 줄고 그나마의 노동 시장은 견고한 학벌 구조의 먹이사슬에 종속되어 있다면 소수의 엘리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실업은 어쩌다 오는 위기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맞닥뜨려야 할 삶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른바 20 대 80의 사회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꼭 취직을 해서 노동을 해야만 살 수 있는가, 먹고 노는 것이 왜 죄악시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사실 직업을 가지고 노동을 하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중세시대만 해도 필요 이상의 노동은 오히려 죄가 되었고 일정한 노동 일수를 초과하면 벌을 받기도 했다.
“누구나 삶의 질 누릴 수 있는 그런 사회가 필요”
자본주의 산업화의 과정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노동의 효율적 관리를 요구했다. 노동권의 개념이 생겨나고 모든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노동에 종속된 삶을 살게 된 것은 결국 잉여 생산에 기초해 자본의 확대 재생산을 도모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필요 때문이었다.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강조되는 것은 기술발전과 함께 자본주의 시스템이 변화하면서 노동력 관리의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 결과는, 탈락한 자들에게는 실업의 좌절과 고통, 살아 남은 자들에게는 끔찍한 과로와 언제 탈락할지 모르는 불안감이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진보 세력이 일자리 나누기와 노동 시간 축소를 주장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극히 타당하다.
중요한 것은 이제 산업화 시대의 ‘노동하는 인간’의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며 노동 중심의 사회적 시스템을 뜯어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노동만으로도 인간적 삶을 누릴 수 있으며 이른바 ‘백수’의 삶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 몇십 조원에 이르는 공적 자금을 밑빠진 독에 부을 것이 아니라 누구나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누릴 수 있는 기초 생활 보장 체제의 구축에 쏟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한 일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무래도 취업을 못해 고민하는 제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기보다 차라리 당당한 백수의 삶을 위해 투쟁하라고 말해주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의 이야기는 아니다. 바다 건너 외국에서 지난 연말에 있었던 일들이다. 대학은 고등학생들에게 청춘을 즐기고 그러면서 ‘참된 인간’이 되기를 당부한다. 대학을 졸업한 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인생의 가장 큰 목표로 남을 돕는 일을 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 나오게 된다.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 아닐까.
서울대학교를 정점으로 촘촘히 짜여 있는 먹이사슬 같은 학벌 구조 속에서 비일류대 출신들이 갖는 열패감은 대학문을 나서는 순간 아주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강의실에서 늘 학벌 구조의 폐해를 강하게 비판하며 그런 당치 않은 현실에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기를 당부해 왔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벽 앞에서 그런 주체성이 과연 그들에게 얼마나 현실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더욱 암담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문제가 단순히 경제 불황의 일시적 결과가 아니라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것이며 가면 갈수록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기술이 발전하고 산업이 고도화할수록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굴뚝산업이 퇴조하고 지식기반 산업 중심으로 재편된다는 이른바 신경제의 핵심은 인적 자원의 유동성을 높임으로써 경제적 효율을 달성한다는 데 있다. 그 결과는 구조조정이란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된 사실상의 무자비한 인원 감축이고 대량 해고이며 실업의 일상화다.
일자리는 줄고 그나마의 노동 시장은 견고한 학벌 구조의 먹이사슬에 종속되어 있다면 소수의 엘리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실업은 어쩌다 오는 위기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맞닥뜨려야 할 삶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른바 20 대 80의 사회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꼭 취직을 해서 노동을 해야만 살 수 있는가, 먹고 노는 것이 왜 죄악시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사실 직업을 가지고 노동을 하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중세시대만 해도 필요 이상의 노동은 오히려 죄가 되었고 일정한 노동 일수를 초과하면 벌을 받기도 했다.
“누구나 삶의 질 누릴 수 있는 그런 사회가 필요”
자본주의 산업화의 과정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노동의 효율적 관리를 요구했다. 노동권의 개념이 생겨나고 모든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노동에 종속된 삶을 살게 된 것은 결국 잉여 생산에 기초해 자본의 확대 재생산을 도모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필요 때문이었다.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강조되는 것은 기술발전과 함께 자본주의 시스템이 변화하면서 노동력 관리의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의미다. 그 결과는, 탈락한 자들에게는 실업의 좌절과 고통, 살아 남은 자들에게는 끔찍한 과로와 언제 탈락할지 모르는 불안감이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진보 세력이 일자리 나누기와 노동 시간 축소를 주장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극히 타당하다.
중요한 것은 이제 산업화 시대의 ‘노동하는 인간’의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며 노동 중심의 사회적 시스템을 뜯어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노동만으로도 인간적 삶을 누릴 수 있으며 이른바 ‘백수’의 삶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 몇십 조원에 이르는 공적 자금을 밑빠진 독에 부을 것이 아니라 누구나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누릴 수 있는 기초 생활 보장 체제의 구축에 쏟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한 일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무래도 취업을 못해 고민하는 제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기보다 차라리 당당한 백수의 삶을 위해 투쟁하라고 말해주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의 이야기는 아니다. 바다 건너 외국에서 지난 연말에 있었던 일들이다. 대학은 고등학생들에게 청춘을 즐기고 그러면서 ‘참된 인간’이 되기를 당부한다. 대학을 졸업한 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인생의 가장 큰 목표로 남을 돕는 일을 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 나오게 된다.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