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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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 유럽 동맹국 핵우산 제공으로 푸틴 저지 나서

미국의 동맹 이탈 조짐에 EU, 유럽 재무장 만장일치 합의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25-03-18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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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프랑스인을 꼽으라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세(1769~1821)를 들 수 있다. 프랑스령 코르시카섬 출신인 나폴레옹은 1804년 황제에 즉위한 후 프랑스를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만들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을 남긴 나폴레옹은 유럽 정복에 나서 총 86번 전쟁을 치렀고 그중 77차례나 승리했다.

    나폴레옹 재위 기간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프랑스인은 최대 600만 명으로 추정된다. 물론 유럽 각국에선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나폴레옹에게는 ‘전쟁광’ ‘독재자’ ‘제국주의자’라는 부정적 평가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최대 실패는 러시아 원정이다.

    나폴레옹 언급하며 벌어진 설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3월 6일(현지 시간) 열린 유럽연합(EU) 정상 회의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3월 6일(현지 시간) 열린 유럽연합(EU) 정상 회의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려고 유럽 모든 국가에 대륙봉쇄령을 내렸는데, 이를 어긴 러시아를 응징하고자 1812년 6월 24일 60만 대군을 이끌고 정벌에 나섰다. 프랑스군은 모스크바까지 점령했지만 러시아군의 청야 전술과 추위 때문에 대패했고, 나폴레옹은 고작 3만 명 병사와 함께 퇴각해야만 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참패 후유증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미국이 우리 편에 서지 않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 유럽 미래는 워싱턴이나 모스크바에서 결정될 필요가 없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유럽 동맹국들에 핵우산을 제공할 의지를 밝히는 등 ‘유럽 자강론’을 강력하게 주창하자, 러시아는 나폴레옹을 소환해 비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3월 6일(이하 현지 시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사자 유가족을 만난 자리에서 “나폴레옹의 최후가 어땠는지는 잊은 채 나폴레옹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며 “러시아의 적들은 러시아를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범했다”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이 과거사를 언급하면서 발끈한 것은 마크롱 대통령이 3월 5일 대국민 연설을 통해 “프랑스가 핵 억지력을 통해 유럽 동맹국들을 보호하는 것에 관한 전략적 대화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기 때문이다. 유럽의 자체적인 핵우산 구축 필요성을 제기한 이유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동맹 이탈 조짐, 푸틴 대통령의 팽창주의 야욕을 들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러시아의 공격적 행동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경을 모르는 듯하다”며 “향후 수년간 러시아는 프랑스와 유럽에 위협이 될 것이고 이 위험의 세계에서 구경꾼으로 남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마크롱 대통령은 3월 6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나폴레옹은 당시 정복 전쟁을 벌였고, 지금 그런 제국주의 행보를 보이는 국가는 러시아뿐”이라며 푸틴 대통령의 비판을 맞받아쳤다. 당시 나폴레옹의 잘못된 행태(제국 확장을 위한 타국 침공)는 지금 프랑스가 아닌 러시아가 저지르고 있다는 의미다.

    마크롱 대통령은 “EU 정상회의에서 여러 유럽 지도자와 핵 억지력 확대에 대해 논의했다”며 “올해 상반기 중 협력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3월 7일 의회 연설에서 “러시아가 세력을 넓히는 가운데 미국은 유럽 핵 안보우산을 축소하고 있다”며 “폴란드 정부는 유럽 핵우산 제안에 관해 프랑스와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프랑스, 핵미사일 동맹국 배치 고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기독민주당(CDU) 대표(오른쪽)는 마크롱 대통령의 핵우산 제안에 적극 호응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페이스북]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기독민주당(CDU) 대표(오른쪽)는 마크롱 대통령의 핵우산 제안에 적극 호응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페이스북]

    마크롱 대통령의 핵 공유 제안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유럽 지도자 중 한 명은 독일 차기 총리가 유력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CDU) 대표다. 메르츠 대표는 “미국의 핵우산 없이도 유럽이 스스로 방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유럽의 두 강대국인 영국, 프랑스와 함께 핵 공유, 또는 최소한 두 나라의 핵 방위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지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독일 중도 보수 성향의 기독민주당과 기독사회당(CSU) 연합은 2월 23일 실시된 총선에서 승리해 제1당이 됐는데, 현재 제3당인 사회민주당(SPD)과 대연정 협상을 벌이고 있다.

    메르츠 대표의 이런 주장은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총리 이후 수십 년간 프랑스의 핵우산 제안을 거절해온 독일 정부의 입장을 바꾼 것이다. 실제로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2007년 핵무기 공유 방안을 모색하는 대화를 시작하자는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기도 했다. 독일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핵 공유 정책에 따라 핵우산을 제공해온 미국과의 관계를 이유로 프랑스 측 제안을 거절해왔다.

    유럽에서 현재 핵보유국은 프랑스와 영국뿐이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프랑스는 지난해 기준 핵탄두 290기를, 영국은 225기를 보유하고 있다. 영국은 뱅가드급 핵잠수함에서 운용하는 전략 핵무기인 트라이던트 Ⅱ D5(SLBM) 핵미사일만 있다. 프랑스 핵전력으로는 르 트리옹팡급 핵잠수함에서 운용하는 전략 핵무기인 M51 탄도미사일(SLBM)과 라팔 전투기에서 운용하는 전술 핵무기인 ASMPA-R 공중발사 핵 순항미사일이 있다. 이 순항미사일은 최대 사거리가 600㎞, 속도는 마하 3이며 300㏏ 핵폭탄을 탑재하고 있다. 프랑스는 지난해 5월 ASMPA-R 공중발사 핵 순항미사일에 모의 핵탄두를 탑재해 라팔 전투기에서 발사하는 시험에 성공한 바 있다. 프랑스는 또한 1997년 이후 처음으로 사거리 1000㎞인 새로운 지상발사 탄도미사일을 개발 중이다. 프랑스는 핵미사일을 장착한 라팔 전투기를 독일 등 유럽 동맹국들에 배치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재무장 계획은 유럽의 분수령”

    ASMPA-R 공중발사 핵 순항미사일을 탑재한 프랑스 라팔 전투기. [프랑스 공군 제공]

    ASMPA-R 공중발사 핵 순항미사일을 탑재한 프랑스 라팔 전투기. [프랑스 공군 제공]

    유럽 국가들이 마크롱 대통령의 핵 공유 제안에 긍정적 입장을 보이는 이유는 러시아의 침략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 재무장하려면 많은 시간과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U 27개 회원국 정상은 3월 6일 특별정상회의에서 안보 독립과 이에 따른 국방예산을 확대하고자 8000억 유로(약 1266조
    8000억 원) 규모의 자금을 조성하는 내용의 이른바 ‘유럽 재무장 계획(ReArm Europe Plan)’에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특히 EU는 회원국들이 국방예산을 증액할 경우 재정 준칙 적용을 한시적으로 유예하고, 자체적으로 마련한 예산 1500억 유로(약 237조5000억 원)를 저금리로 대출해주기로 했다. EU 회원국들은 그동안 엄격한 재정 준칙에 따라 재정적자와 국가부채를 각각 국내총생산(GDP)의 3% 이하, 60% 이하로 유지해야 했고, 이를 어길 시 EU 차원의 제재를 부과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재무장 계획은 유럽에 분수령이 되는 순간”이라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유럽이 자체적으로 독자적인 안보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유럽이 미국 도움 없이 자력으로 방어할 수 있기까지 최소 10년은 걸릴 것”이라며 “미국 지원 없이 전력을 갖추려면 유럽 국가들이 GDP의 4% 이상을 국방비로 지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벨기에 싱크탱크 브뤼헐은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미군 30만 명이 배치될 것으로 예상하면서, 이를 유럽군으로 대체하려면 새로운 여단 50개가 필요하고 그중 다수가 중무장해야 한다고 추정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핵우산 공유를 제의한 것도, 상당수 유럽 국가가 이에 공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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