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29

2024.03.01

트럼프 당선 가능성 높아지자 ‘자체 핵무장론’ 불붙은 독일

과거 가장 강력한 반핵국가였으나 최근 러시아 핵 위협 등으로 태도 변화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24-03-04 17: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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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 결정(double-track decision) 전략’은 냉전시절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가 동독 등 동유럽에 배치된 소련의 핵무기에 맞서 서독 등 서유럽에도 동일한 수준과 규모의 핵무기를 배치한 것을 말한다. 당시 나토가 이 전략을 추진했던 것은 헬무트 슈미트 전 서독 총리의 과감한 결단 때문이었다.

    반핵의 나라 독일

    전술핵 폭탄을 탑재할 수 있는 독일 공군 전투기들이 기동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독일 공군 제공]

    전술핵 폭탄을 탑재할 수 있는 독일 공군 전투기들이 기동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독일 공군 제공]

    소련은 1975∼1976년 중거리탄도미사일 SS-20을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일원인 동독을 비롯해 동유럽 국가들에 배치했다. SS-20은 사거리가 5000㎞이고, 핵탄두 3개를 탑재할 수 있는 가공할 만한 무기였다. 서독은 물론 서유럽에는 이에 대항할 핵무기가 전혀 없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슈미트 전 총리는 1977년 소련이 동독에서 SS-20을 철수시키지 않을 경우 나토 회원국인 서독도 미국의 중거리 탄도미사일인 퍼싱-II를 배치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소련의 도발에 대한 대응 방안을 찾지 못하던 미국은 슈미트 전 총리의 제의에 반색했다. 미국은 서독 국민들의 반핵과 평화 운동을 상당히 껄끄럽게 생각해왔기 때문이었다. 나토는 1979년 서독 등 서유럽에 사거리 1800㎞, 5~80kt의 W85 핵탄두가 탑재된 퍼싱-II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서독에선 연일 반핵 시위가 벌어졌다. 슈미트 전 총리가 소속된 사회민주당(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전 총리를 비롯해 대부분의 의원들도 반대했다. 사민당 내 환경주의자와 평화주의자는 반핵을 기치로 내걸고 탈당해 녹색당을 만들었다. 심지어 극좌 성향의 학생들은 슈미트 전 총리를 암살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지만 나토는 퍼싱-II 미사일을 실전 배치했다. 이후 미국과 소련은 1987년 중거리핵미사일폐기협정(INF)을 체결하고 유럽에 배치된 핵미사일들을 철수시켰다.

    독일에서 핵 문제는 가장 뜨거운 감자다.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전범국가인 독일에선 원전은 물론 핵무기 배치와 개발 등은 금기 사항이다. 게다가 독일 반핵운동 단체들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독일 정부가 2023년 4월 모든 원전 가동을 완전히 중단한 것도 반핵 운동 단체들의 끈질긴 반대 운동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독 북부 브로크도르프 원전 부지에서 1981년 2월 벌어진 반핵 시위를 들 수 있다. 당시 시위에 10만여 명이 모였는데 서독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다.



    반핵 운동에 앞장서 온 녹색당은 1983년 5.6%를 득표해 처음으로 연방의회에 진출했고, 이후 중요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녹색당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인 2011년 3월 27일 치러진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선거에서 과거보다 두 배 넘는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주 의회에서 다수당이 됐고, 당 역사상 최초로 주지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바덴뷔르템베르크주는 중도 우파인 기독민주당(기민당)의 텃밭이었다. 결국 2011년 5월 정치적 압박을 받은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는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방위비 압박 넣는 트럼프

    서독 수도 본에서 1981년 벌어진 퍼싱 II  미사일 배치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 모습. [위키피디아]

    서독 수도 본에서 1981년 벌어진 퍼싱 II 미사일 배치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 모습. [위키피디아]

    독일에선 나토의 핵 공유 정책에 따라 미국이 배치한 전술핵에 대해서도 철수 운동이 벌어져왔다. 나토 핵공유 체제는 미국이 유럽 5개국(벨기에·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튀르키예) 6개 기지에 B61 계열 전술핵폭탄 250여 개를 배치하고, 이들 5개국과 투발 수단을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전술핵 사용에 대한 최종 권한은 미국이 갖고 있다.

    나토의 핵 공유 체제는 서독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만들어졌다. 1949년 나토 창설 이후 자체 핵무장을 달성한 영국과 프랑스와 달리 서독은 유럽의 중심 지역에 위치해 재래식 전쟁이나 전술핵을 사용한 전쟁이 벌어질 경우 자국 영토가 전쟁터가 되는 지리적 약점을 안고 있었다. 서독은 소련의 핵 공격에 대비해 자국에 배치된 미국 전술핵의 사용권을 실질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달라고 미국에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나토 핵계획그룹(Nuclear Planning Group·NPG)이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반핵 단체들과 정치인 대부분은 전술핵무기를 독일 영토에서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원전과 핵무기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하게 반대해온 독일에서 자체 핵무장론이 제기되고 있다. 독일은 1970년 발효된 핵확산금지조약(NPT) 회원국이고 미국, 영국, 프랑스, 옛 소련과 동·서독의 통일을 확정한 1990년 통일 조약에서도 핵무기 포기를 선언한 바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나토 등 서방에 대해 핵 위협을 하면서 핵무장론이 불거지는 실정이다. 러시아는 미국과의 핵무기 감축 조약 참여 중단을 선언하고,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거론하는 등 핵 위협 수위를 높여왔다. 특히 러시아는 지난해 군사 동맹국 벨라루스에 전술핵까지 배치했다. 벨라루스에서 전술핵탄두가 탑재된 이스칸데르-M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면 독일 전역을 타격할 수 있다.

    11월 5일 실시될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다는 점도 자체 핵무장론에 불을 붙이는 요소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2월 10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 유세에서 나토의 유럽 회원국들이 충분한 방위비를 지출하지 않으면 러시아의 공격을 용인할 수 있다는 내용의 폭탄 발언을 쏟아냈다. 당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나토 정상회의에서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한 회원국 정상에게 “당신네들을 보호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나는 그들(러시아)이 원하는 것을 내키는 대로 모조리 하라고 격려할 것이라고 위협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집권 당시에도 나토 회원국들이 자국 안보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면서 나토 회원국들의 방위비 증액을 압박했었다. 이에 따라 나토의 유럽 회원국들에선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될 경우 나토의 집단방위를 무력화하고 핵우산 제공을 중단할 가능성에 대해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독일 정치권에선 유럽의 양대 핵무기 보유국인 영국․프랑스와 협력해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美 핵탄두 1000발 구매’ 목소리

    러시아군은 지난해 벨라루스에 전술핵을 탑재할 수 있는 이스칸데르-M 단거리   배치했다. [러시아 국방부 제공]

    러시아군은 지난해 벨라루스에 전술핵을 탑재할 수 있는 이스칸데르-M 단거리 배치했다. [러시아 국방부 제공]

    주목할 점은 독일이 영국․프랑스와 의지할 수 없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는 것이다. 사민당 및 녹색당과 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자유민주당(자민당)의 크리스티안 린트너 재무장관은 2월 24일 독일 프랑크프루트 알게마이너 자이퉁(FAZ)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는 미국 대신 안보를 의존할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면서 “너무 늦기 전에 핵무장과 관련한 금기를 깨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도우파성향의 제1 야당 기민당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대표와 중도좌파성향의 제1당 사민당의 일부 주요 인사들도 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독일 안보·군사전문가인 막시밀리안 테르할레도 미국에서 핵탄두 1000발을 구매해야 한다면서 프랑스와 영국이 보유 중인 핵무기와 이를 합치면 유럽 단독으로 155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게 되는 만큼 러시아의 잠재적인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충분히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올라프 숄츠 총리와 아날레나 베어보크 외무장관,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국방장관 등 독일 정부 주요 인사들은 대부분 독자 핵무장은 물론, 영국․프랑스와의 핵 협력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독일 정부는 무엇보다 군사력 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피스토리우스 독일 국방장관은 최근 뮌헨에서 열린 안보 분야 국제회의체인 ‘뮌헨안보회의(MSC)’에서 “독일이 국내총생산(GDP)의 2%를 국방예산으로 지출한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며 “국제 정세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 있지만 앞으로 GDP의 3% 또는 3.5%까지 국방예산을 늘릴 수 있다”고 밝혔다. 피스토리우스 장관의 이 발언은 “2030년대까지 국방예산으로 GDP 대비 2% 초과 달성 약속을 지키겠다”는 숄츠 총리의 입장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전 세계에서 GDP의 3% 이상을 국방예산으로 사용하고 있는 국가는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인도, 폴란드 등이 있다. 피스토리우스 장관의 의도는 독일이 전범국가의 족쇄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재무장하겠다는 것이다. 독일의 올해 1992년 이후 처음으로 국방예산이 GDP의 2%를 넘어섰다. 유럽연합(EU)을 대표하는 나토 회원국이면서도 수십 년간 국방예산 지출에 소극적이었던 독일의 안보 정책 기조가 달라진 것은 러시아와 미국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뿐만 아니라 나토의 유럽 회원국들도 앞다퉈 국방예산을 늘리고 있다. 나토에 따르면 지난해 31개 회원국 가운데 GDP의 2%를 국방예산으로 지출한 국가는 미국 등 11개국이었지만 올해 18개국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2014년 3개 회원국만 GDP 대비 2%를 넘어섰던 것과 비교하면 18개국의 목표 달성은 기록적인 수치”라고 말했다. 게다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했을 때 독일을 비롯해 나토의 유럽 회원국들이 자체적으로 핵무장해야 한다는 정책을 추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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