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동산가격은 오르고 기업 수익은 늘어나는데 일자리는 줄어든다, 알파고의 등장으로 바둑의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미국과 영국은 ‘고립주의’를 택했다…. 언뜻 별개의 현상처럼 보이지만 거대한 변화의 흐름과 연결할 수 있는 사건들이다. 네트워크 기반의 인공지능(AI)과 혁신적인 생산력을 지닌 ‘로봇’이 결합된 사회 변화, 즉 4차 산업혁명의 징후들이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4차 산업혁명의 충격적인 변화 때문에 국가 전략부터 다시 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혁명의 현장에서 뛰고 있는 전문가에게 그 의미와 대응 방안을 듣는다. <편집자 주>
“저는 요즘 P2P 금융 논리 엔진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충격’을 주제로 서울 서초구 한 사무실에서 만난 고진석(46) 텐스페이스 대표는 자신의 프로젝트 얘기부터 꺼냈다.
“페이스북이나 구글 같은 온라인 플랫폼이 이제 ‘금융회사’로 진화하고 있어요.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4차 산업혁명의 단초일 겁니다.”
최근 가장 빠른 성장을 보인다는 ‘P2P 대출’의 원리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기존 신용평가기관이 간과한 개인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신용도를 찾아내 ‘돈을 잘 갚을 사람’을 구분한다는 것. 온라인에서 평판이 좋은 사람은 돈도 잘 갚을 공산이 크기 때문에 저렴한 금리로 빌려주겠다는 뜻이다. 돈을 빌려줄 사람이나 빌릴 사람도 전부 온라인으로 처리 가능해 복잡한 서류가 사라진다.
“과거 미국에서는 연소득이 낮아도 주택 보유나 전기요금 납부 실적 등을 신용평가 기준의 하나로 삼는 혁신을 선보인 바 있죠. 이젠 빅데이터 관점에서 SNS 활동 내용, 자기계발 여부, 각종 라이프스타일 등을 기계(인공지능·AI)가 꼼꼼히 분석합니다. 즉 SNS의 글 한 줄 한 줄이 개인의 신용정보가 되는 시대인 거죠.”
그렇다면 온라인에서 거짓말을 하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빅데이터는 인간의 얄팍한 술수를 훌쩍 뛰어넘는다. 누군가 미국 하버드대 졸업생이라고 주장하면 SNS에는 그 대학 친구들이 많아야 하고, 직장이 서울이라면 해당 지역 인터넷 프로토콜(IP)이 떠야 하며, 신용카드 사용 명세만 보면 개인의 건강 상태까지 통계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 부정적으로 보면 감시사회지만, 반대로 보면 신용창출이다.
그가 생각하는 기존 ‘금융시스템’의 문제점은 지나칠 정도의 가혹함이다.
“기준금리는 1~2%이지만 담보물이 없는 개인은 연 27% 이상 고금리를 써야 하는 이상한 구조입니다. 작은 실수라도 하면 벌(고금리)로 응징합니다. 일부는 살아남지만 상당수가 파산으로 내몰리죠. 신용대출이 어렵다 보니 결과적으로 부동산 소유자만 승리하게 됩니다.”
국내 인터넷 벤처업계 1.5세대에 속하는 고 대표는 1999년 국내 첫 SNS인 ‘아이러브스쿨’의 기술담당이사였다. 이어 국내 최초라 부르는 여러 온라인 쇼핑몰, 게임회사, 교육회사 등을 거쳤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출신인 엔지니어지만, 일찌감치 성철 스님과 숭산 스님의 영향으로 불교철학에 눈을 떴고 이를 미래사회와 연결해 ‘우리는 어떻게 프로그래밍 되었는가’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같은 책도 출간했다.
한때 온라인 메신저와 게임사업에 공들였던 그가 다시 AI 기술에 매진하는 이유는 미래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20년 전엔 모두가 AI에 반신반의했어요. 하지만 인류는 위대했습니다. 문제는 높아진 생산성을 어떻게 감당하느냐입니다. 빅데이터 신용평가 사례에서 보듯, 먼 미래엔 모든 것을 기계가 처리합니다. 글도 기계가 쓰고 회사 일도 대신해줍니다. 세계적 기업 지멘스도 ‘당장 직원의 절반이 없어도 된다’고 할 정도예요. 기업에게 남은 혁신은 ‘사람을 자르는 일’뿐이죠.”
현 금융시스템 사회적 약자에 가혹
생산성의 발달은 오히려 ‘저녁이 있는’ 행복한 미래보다 ‘직업을 잃는’ 공포를 불러올 수 있다. 무인매장인 ‘아마존 고’는 서비스업의 꽃인 판매원, 구글 무인자동차는 수많은 운전사의 일자리를 위협한다. 누군가는 ‘오류 가능성’ 또는 ‘윤리 문제’를 들어 반대하겠지만 그마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시급한 일은 이에 대처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와 국가 혁신이다.“이제 문명은 ‘4차 산업혁명’을 위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일자리가 늘 수는 없어요. 특히 한국은 공장자동화율 세계 1위 국가입니다.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합니다. 전 국민에게 기본급여를 지급하고, 사흘 일하면 나흘은 노는 문화를 받아들여야 해요.”
이 대목은 자연스레 금융 혁신과 연결된다.
“금융은 오로지 호모사피엔스만 하는 행위입니다. 믿으니까 빌려주는 것이고, 그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미래가 창출되는 겁니다. 돈은 빠르게 흘러야 하는데, 사회적 약자인 청년과 서민에게는 유독 가혹하죠.”
미래를 지속하는 데 가장 절실한 대목은 신용 창출이다.
“금융을 연구하면 사회안전망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과거에는 징벌적 평가가 합리적이었어요. 하지만 변하지 않으면 모두 도망갈 겁니다. 캐나다나 핀란드처럼 개인이 파산에 이르지 못하도록 돕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합니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창조경제’라는 화두 아래 온라인 금융 분야의 혁신이 본격화되긴 했다. 액티브X와 공인인증서 논란이 대표적 사례. 그러나 폐지해야 한다는 명분만 내세웠을 뿐 행정력의 뒷받침이 없어 한국 금융산업은 혁신에 실패했다.
“핀테크(FinTech) 업계는 개방과 혁신의 기운이 넘치는 곳입니다. 반면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죠. 규제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틀에 갇혀 미래 가능성까지 막고 있어요. 전 세계가 외면한 공인인증서를 고집하는 우리 정부의 명분이 서민금융 보호입니다. 가상화폐 비트코인을 거부한 이유 역시 마찬가지죠. 그런데 국민연금이 수천억 원 손해를 봤다는 의혹에 휘말리는 상황과 대비해보면 너무 한심한 거예요. 새로운 기술은 사고를 쳐봐야 얼마 안 하거든요.”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에 오히려 수동적이 돼버린 시대. 하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낙관적 자세’임을 주문한다. 잘 놀아야 한다는 얘기다. 아니, 일자리 없이 어떻게 즐거울 수 있을까.
“금융은 대중의 믿음 위에 세워진 가상의 세계입니다. 자본주의가 살아남은 이유는 미래에 대한 낙관 때문이었어요. 어차피 다 살게 마련입니다. 일자리가 줄어들어 기본소득제 논의가 시작됐잖아요. 권력을 젊은이에게 넘기고 그들이 ‘잘 놀고 잘 먹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죠. 그래서 저는 스타트업에 소액이라도 투자합니다. 이 시대에 남은 마지막 윤리이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