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긍정의 하강 사선

사선은 영화와 애니메이션 곳곳에도 숨어 있다. 미셸 오슬로 감독의 ‘프린스 앤 프린세스(Princes And Princesses·1999)’는 심플한 형태와 색상이 녹아든 실루엣 애니메이션의 디테일한 묘사로 캐릭터의 상황과 감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총 6편의 단편 애니메이션 중 ‘마녀의 성’ 에피소드에서 이야기의 전개를 돕는 하강 사선을 발견했다. 사선이 주인공을 돕는 장면을 소개한다.
아무도 들어간 적이 없는 마녀의 성이 있다. 어느 날 왕비가 마녀의 성에 들어가는 왕자에게 공주를 신부로 주겠다고 선언하자 많은 왕자가 마녀의 성문을 열고자 도전한다. 말뚝, 대포, 불화살 등 무력으로 마녀의 성문을 열려고 시도하지만 마녀는 그들의 공격을 모두 막아낸다. 아무도 마녀의 성문을 열지 못할 거라고 수군대는 군중 사이로 한 청년이 지나간다. 나무 위에서 왕자들의 실패를 묵묵히 관찰하던 청년이 문을 열겠다고 나선 것이다. 군중은 그를 비웃지만 청년은 거침없이 언덕을 내려와 마녀의 성문 앞으로 걸어간다. 무기 하나 없는 그가 한 행동은 ‘노크’다.
청년의 등을 떠미는 사선
“들어가도 될까요?”청년이 정중하게 청하자 마녀는 1초도 안 돼 문을 열고 청년에게 말한다.
“성에 들어오기 전 내 허락을 구한 건 당신이 처음이에요.”
다른 왕자들이 무력으로 공격하자 마녀는 무력으로 응대했고, 청년이 배려로 다가가자 마녀는 배려로 맞이했다. 청년은 나무 위에서 왕자들의 싸움을 지켜보며 마녀가 원하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과 투쟁하는 포악한 마녀는 자신의 상처를 이해해줄 따스한 손길을 원했던 것이다. ‘사실은 싸우고 싶지 않아요. 저를 치료해줄 사람이 필요해요.’ 마녀 내면의 목소리를 들은 청년이 노크한 것은 성문이 아니라 마음의 문이었다.
그가 주위의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걸어갈 때 단 하나의 아군, 오른쪽 방향의 하강 사선이 그를 지지한다. 어서 가서 외로운 마녀를 위로하라고 청년의 등을 떠민다. 그릇에 물이 차오르면 흘러넘치듯, 마녀의 마음을 꿰뚫어본 청년의 행동 또한 자연스레 이뤄졌다. 왕자들이 미션을 해결하고 얻을 부상에 현혹됐을 때 청년은 마녀에게 집중했다. 삶은 청년이 알아야 할 것을 알았다고 판정하고 너무 가파르지도, 너무 완만하지도 않은 사선을 그에게 보냈다.
하강 사선의 도움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다. 바쁘게 몰아치는 며칠간의 일을 끝내고 기운을 회복하고자 곰탕집을 찾은 날, 손님이 떠난 테이블 곳곳에 받침에 반쯤 걸친 뚝배기들이 놓여 있다. 나 또한 가득 찼던 뽀얀 국물이 사라지고 검은 바닥이 드러날 무렵 뚝배기를 비스듬히 세운다. 남은 국물 한 숟가락까지 떠먹으려는 노력에 사선이 지그시 웃으며 도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