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분쟁 중재 지속가능하려면

[이윤현의 보건과 건강]

  • 이윤현 남서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 (대한검역학회 회장)

    입력2025-12-20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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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료분쟁은 대부분 옳고 그름의 다툼이 아니다. 서로 다른 진실과 고통이 충돌하는 사건이다. GETTYIMAGES

    의료분쟁은 대부분 옳고 그름의 다툼이 아니다. 서로 다른 진실과 고통이 충돌하는 사건이다. GETTYIMAGES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중재원) 조정위원으로 1년간 활동하면서 ‘인간의 고통’과 ‘의료의 한계’가 교차하는 순간을 수없이 마주했다. 회의실에 들어서면 늘 2개의 서로 다른 시선이 나를 기다렸다. 한쪽은 억울함과 분노로 얼굴이 붉어진 환자와 그 가족의 것이었다. 다른 한쪽에는 당황스러움과 부담감을 숨기지 못하는 의료진의 눈빛이 있었다. 

    팽팽한 긴장과 무거운 공기

    한국에서 의료분쟁 조정이 본격화한 것은 2012년부터다. 그해 중재원이 출범하면서 의료사고 피해자가 소송을 하지 않고도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제도가 정착되면서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의료분쟁 조정 절차가 개시된 사건 중 67.9%는 당사자 간 합의나 조정이 성립됐다. 미국·영국 등 의료 선진국의 중재·조정 성공률(70~80%)보다는 다소 낮지만 국제 기준에 근접한 것은 분명하다. 

    단, 그 과정이 쉽지는 않다. 조정 현장에서는 언제나 팽팽한 긴장과 무거운 공기가 느껴진다. 치아 교정 후 10여 년이 지나 다시 틀어진 치열 때문에 수년간 통증과 심리적 피해를 겪었다고 호소하며 조심스레 보상을 요구하던 20대 청년이 떠오른다. 스스로 병원에 걸어 들어가 척추 수술을 받은 뒤 다시는 걷지 못하게 된 어르신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하고자 수개월에 걸쳐 모아온 기록과 진단서들을 내밀었다. 서류 묶음은 결코 얇지 않았고, 그 무게만큼이나 마음속 상처도 깊어 보였다. 

    이런 순간을 만나면 조정위원은 마음이 흔들린다. 하지만 의료진 혹은 그 대리인 또한 할 말이 있다. 그 사이에서 말 한마디, 판단 하나가 만들어낼 파장을 고려하며 조정을 이끌다 보면 의료분쟁은 대부분 옳고 그름의 다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진실과 고통이 충돌하는 지점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해외 연구를 보면 의료분쟁 조정 실무자의 번아웃 위험은 일반 직종 종사자의 1.5~2배에 달한다. 불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감정적 편향을 경계하며 양측 현실을 모두 받아들이다 보면 심신의 에너지가 서서히 소진되는 것이다. 필자 또한 1년간 조정위원으로 활동한 뒤, 조정 때마다 감당해야 하는 우울과 슬픔으로부터 스스로를 돌보고자 그만 멈춰 서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환자와 의료진의 고통을 조율하는 조정위원과 실무진의 건강이 이 제도의 지속성 및 신뢰도 제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건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의료분쟁 조정 현장을 떠받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심리 상담과 정서 회복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 그 시스템이 만들어질 때 의료분쟁 중재 제도는 한국 의료의 견고한 안전망으로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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