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강원 횡성군 (사)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의 분주한 하루가 시작된다. 애벌레 아빠(이강운 소장·58)와 애벌레 엄마(아내 이정옥 씨·58)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애벌레 사육실로 향한다. 이곳에는 애벌레 1000여 종이 살고 있다.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주변 및 전국에서 채집해 먹이식물과 함께 이곳으로 이사 온 애벌레들은 생물 분류의 과(Family), 크기, 행동학적 특성에 따라 각 방(cage)으로 옮겨진다. 암컷 어른벌레는 짝짓기 방에 넣어 산란을 유도하기도 한다.
“애벌레는 대부분 야행성이라 밤새 먹이를 먹어요.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애벌레가 먹고 싼 똥을 치우는 겁니다. 얘들은 따로 수분을 섭취하지 않고 잎의 수분을 먹기 때문에 똥 자체가 묽은 편이어서 제때 치워주지 않으면 금세 곰팡이가 생겨요. 숨구멍을 통해 미세한 곰팡이가 들어가면 바로 죽죠. 그래서 하루에 두 번씩 먹이를 주고 두 번씩 배설물을 치워야 합니다. 특히 여름철에는 아침에 준 먹이가 오후가 되면 상할 수 있어 신선한 먹이 공급에 더 신경 쓰죠. 또 애벌레마다 식성이 달라 먹이식물도 각각 준비해야 합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듯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애벌레에 매달린 지 벌써 20년이 됐네요.”
애벌레 연구는 지루한 반복과 무한한 기다림
이강운 소장이 곤충에 빠져 회사 생활을 접고 횡성으로 와 홀로세생태학교를 시작한 것이 1997년이니 해가 바뀌면 딱 20년이다. 그동안 많은 연구원과 제자가 이곳을 찾아왔지만 대부분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떠났다. 채집하고, 알을 받고, 부화한 애벌레의 까다로운 식성에 맞춰 먹이를 주고, 어른벌레로 우화(羽化)할 때까지 전 과정을 지켜보면서 기록하는 애벌레 생활사 연구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이다. 기껏 먹이고 돌봐 잘 키웠건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은 채 속절없이 떠나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어른벌레가 돼 정체를 알 수 있을 때까지 몇 년씩 걸려 애태우는 녀석도 있다. 사육한 애벌레의 생존율이 20~30%밖에 안 되니 때로는 허탈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애벌레 돌보기를 띄엄띄엄 할 수도 없는 일. 봄부터 가을까지 애벌레가 활동하는 시기에 연구소 사람들은 외출 한 번 마음 놓고 하지 못한다. 이처럼 애벌레는 지루한 반복과 무한한 기다림으로 인간을 시험한다. 그래서 이 소장은 생물학을 ‘시간의 학문’이라고 했다.1997년 홀로세생태학교로 시작해 2005년 환경부 산하 비영리사단법인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를 설립했다. 그사이 2만3000여 평(약 7만6033㎡) 산자락에 본관 건물, 실험실, 박물관, 방목장이 들어섰다. 또 환경부로부터 서식지 외 보전기관(2005), 생물다양성 관리기관(2014)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 소장은 2014년 자연환경 보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는 영광도 안았지만 정작 그가 20년간 공들인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사람들이 “이 애벌레 이름이 뭐냐”고 물을 때다. 예전 같으면 애벌레를 징그러운 벌레, 농작물을 망치고 숲을 병들게 하는 해충으로만 보던 시선이 조금씩 바뀌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어서다.
박멸해야 할 해충에서 소중한 자원으로
전화로, e메일로 애벌레 관련 질문이 빗발치자 이 소장은 애벌레 도감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현재 나방과 나비종을 포함한 한반도 나비목은 3800여 종에 이르지만, 어떤 알이 부화해 애벌레가 되고 그 애벌레가 어떤 어른벌레가 되는지, 또 그 애벌레가 무엇을 먹고 자라는지 정확히 밝혀진 경우가 많지 않았다. 이 소장은 2015년 12월 국립생물자원관과 함께 ‘한국의 나방 애벌레 도감I’을 펴냈는데, 500종에 대한 자료를 책 한 권에 담느라 포기해야 했던 정보가 너무 많아 안타까웠다. 그 아쉬움을 달래준 책이 최근 그가 자비를 들여 펴낸 애벌레 도감 ‘캐터필러I’(도서출판 홀로세)이다.
“캐터필러(Caterpillar)는 원래 ‘바퀴’ 또는 ‘궤도’를 뜻하는 단어로, 나비나 나방 같은 나비목에 속하는 애벌레를 지칭합니다. ‘길 없는 길’을 스스로 만들어가며 움직이는 굴착기나 불도저처럼 많은 다리를 이용해 활동하는 행동학적 특징을 말하며, 애벌레 시절에만 존재하는 배다리와 항문다리를 포함한 5~8쌍의 다리로 꿈틀꿈틀 기어가는 모습을 일컫습니다. 애벌레 도감 ‘캐터필러Ι’에서는 애벌레를 사육하며 알게 된 모든 생물학적 정보, 가령 극적인 반전을 보여주는 애벌레의 형태, 색상, 알, 고치나 번데기, 그리고 먹이식물과 분류학적 열쇠라 할 수 있는 머리, 센털 등을 망라했습니다. 이를 그림과 사진, 전자현미경적 관찰과 분류학적 설명을 통해 전달했습니다.”
애벌레 153종을 소개한 ‘캐터필러I’에 이어 내년까지 ‘캐터필러II’와 ‘캐터필러 III’까지 출간할 계획인 이 소장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애벌레 도감”이라고 자신한다.
그를 만나면 사람들이 꼭 묻는 질문이 있다. “왜 애벌레인가”다. 전 재산과 인생 후반부를 다 바쳐 연구하는 주제가 왜 하필 애벌레냐는 것이다. 상대가 행여 성충, 유충 하면서 아는 척이라도 할라치면 그는 꼭 용어부터 바꿔준다.
“성충, 유충이라는 말은 식민지 냄새가 나는 일본어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입니다. 성충은 어른벌레, 유충은 애벌레, 미성숙유충은 어린애벌레, 성숙유충은 다자란 애벌레, 기주식물은 먹이식물로 바꿔 부르면 누구나 이름만 듣고도 쉽게 알 수 있죠.”
생태계에서 애벌레의 중요성을 설명할 때 그는 ‘자연의 소시지’란 표현을 즐겨 쓴다. 쉽게 말해 애벌레는 다른 동물에게 단백질과 무기질이 풍부한 먹잇감이다. 예를 들어 산누에나방과 애벌레는 100g당 열량이 370kcal로 쇠고기 219kcal, 돼지고기 333kcal보다 많다. 애벌레의 단백질 함량은 쇠고기와 비슷한 수준이고, 칼슘은 쇠고기의 30배, 철은 10배, 인은 3배가량 많다. 더욱이 나비목의 애벌레인 캐터필러는 딱딱한 껍질이 없어 새나 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먹잇감이다. 만약 인간이 해충을 박멸한다며 애벌레를 없애버리면 생태계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번데기의 우화 시기는 기온과 관계가 깊어 기후 온난화에 따른 생태계 변화를 살펴보는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 그는 2011년부터 붉은점모시나비의 우화 시기 변화를 관찰하고 있는데 해마다 눈에 띄게 우화 시기가 앞당겨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붉은점모시나비는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으로 국내에서 함부로 포획하면 최고 3000만 원의 벌금형에 처해질 만큼 귀한 몸이다. 서식지 외 보전기관인 연구소는 2006년 6월 원주지방환경청으로부터 허가받아 두 쌍을 채집한 뒤 10년 동안 2000마리 가까이 증식시키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놀라운 발견도 했다. 한겨울 영하 27도에서도 알에서 애벌레가 나오는 것을 보고 연구를 거듭하니 붉은점모시나비 애벌레가 영하 48도까지 견딜 수 있는 ‘내(耐)동결물질’을 함유하고 있음을 발견한 것. 이 소장은 4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생물환경소재은행학회(ISBER)에 참석해 이 사실을 보고하기도 했다. 이 소장은 붉은점모시나비의 체내에 있는 물질을 ‘자동차 부동액’에 비유하며 “이 물질이 인간의 삶에 어떤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애벌레는 장차 의학, 생체모방, 식품, 사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산업적 활용도가 무궁무진한 생물자원이다. 더는 푸대접하지 않는 것이 이들에 대한 보답”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