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목이라는 낯선 용어가 어느새 현대인을 상징하는 용어로 자리잡은 지금, 이진경의 유쾌한 철학적 유목을 보여주는 ‘노마디즘’이 탄생했다. 이 책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공저 ‘천의 고원’에 대한 일종의 해설서다. ‘천의 고원’ 12장에서 유목론은 꽤 비중 있게 다뤄진다.
사실 ‘천의 고원’은 보통 사람들에게 넘기 힘든 고지다. 장이 바뀔 때마다 지층화, 배치, 리좀, 일관성의 구도, 기관 없는 신체, 탈영토화, 추상기계 등 이질적인 개념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철학이란 개념을 창조하는 활동”이라고 한 두 천재들에게 용어 만들기는 즐거운 유희였겠지만, 일반 독자들은 소화불량에 걸리기 딱 맞다. 게다가 정신분석, 철학, 문학, 언어학, 신화학, 민속학, 동물행동학, 경제학, 고고학, 음악, 미술사, 물리학, 분자생물학, 수학 등 온갖 ‘학문’을 총동원한 그들의 사유방식에 질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이진경씨는 1998 년 겨울부터 4년에 걸쳐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에서 이 책을 강의했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은 ‘천의 고원’을 통해 내가 말했던 기록이고, 그 책과 더불어 내가 사유했던 기록이며, 그 책-기계를 이용해서 내가 알게 된 것, 만들어낸 것들의 기록이다. 또한 그 책을 통해서 내가 그들의 사유와 섞이며 끄집어낸 것들의 모임이며 그들과 내가 만나고 헤어졌던 흔적들의 집합”이라고 했다. 겁 없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의 고원’에 도전했다가 쓰디쓴 실패를 맛본 사람들에게 ‘노마디즘’은 고원을 넘는 데 도움을 주는 지도, 혹은 복잡한 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는 매뉴얼처럼 반갑기 짝이 없다.
구어체로 진행되는 이진경의 강의록에 집중하다 보면 “음반을 걸어놓고 음악을 듣듯이 읽어달라”고 한 들뢰즈의 주문이 어렴풋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이진경의 강의는 쉽다. 들뢰즈가 ‘천의 고원’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꼽은 ‘배치’를 설명할 때 그는 축구공과 입을 예로 든다. 축구공은 축구공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경기 도중 우리 편 선수에게 날아가면 ‘패스’가 되고 잘못 차서 다른 편 선수에게 가면 ‘패스미스’, 골 그물을 흔들면 ‘골인’이 된다. 이처럼 하나의 사물이 다른 것과 하나의 계열을 이루어 연결되는 것이 ‘계열화’이며, 공시적(共時的) 차원에서 만들어지는 계열이 곧 ‘배치’다. 배치 안에서 각각의 항은 다른 이웃 항과 접속하여 하나의 ‘기계’로 작동한다. 입은 식당이라는 배치 안에서 ‘먹는 기계’가 되고 강의실에서는 ‘말하는 기계’가, 침실에서는 ‘섹스 기계’가 된다. 또 배치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어떤 항을 자기 안에 포섭하여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영토화’와 거기서 벗어나는 ‘탈영토화’가 이루어진다.
이처럼 저자는 ‘천의 고원’에 난삽하게 등장하는 개념들을 깔끔하게 정리했을 뿐 아니라 저변에 깔린 하이데거, 레비-스트로스, 라캉, 푸코의 철학적 사유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천의 고원’ 속에서 헤매던 사람들이 ‘노마디즘’을 통해 ‘안티 오이디푸스’(들뢰즈·가타리 공저)와 ‘감시와 처벌’(푸코), ‘카프카-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들뢰즈·가타리 공저)가 연결되는 통로를 찾았을 때 짜릿한 지적 쾌감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노마디즘’은 대가들의 뒤만 쫓는 주석서가 아니다. 이 책 ‘0장 차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 ‘9장 미시정치학과 선분성’ ‘12장 유목의 철학, 전쟁기계의 정치학’에는 80년대 마르크스주의를 탈근대적 사유로 확장시키려는 이진경 표 철학이 담겨 있다. 즉 들뢰즈와 가타리를 샅샅이 해부하되 그 안에 매몰되지 않은 독자적 사유를 보여준다. 책을 펼치면 “어렵더라도 처음 듣는 음악이 생소하고 귀에 선 것과 마찬가지려니, 생각하세요. 더구나 현대철학 아닙니까?” 이진경의 경쾌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노마디즘 전 2권/ 이진경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 1권 788쪽, 2권 768쪽/ 각 권 2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