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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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상인, 코냑을 부흥하다

[명욱의 술기로운 세계사] 쉽게 상하는 와인 증류해 영국에 판매한 것이 시초

  •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

    입력2024-08-20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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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냑을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린 이들은 네덜란드 상인이었다. [GettyImages]

    코냑을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린 이들은 네덜란드 상인이었다. [GettyImages]

    오늘날 세계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시스템 안에서 굴러가고 있다. 자본주의 꽃은 주식시장이고, 주식시장 중심에는 주식회사가 있다. 이 주식회사가 처음 시작된 곳이 북유럽 금융의 중심지로 알려진 네덜란드다. 흥미로운 사실은 네덜란드가 금융은 물론, 술 역사에서도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보르도 와인 무역 담당한 네덜란드

    1453년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보르도의 카스티용 전투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백년전쟁 결과 영국은 보르도를 떠났고 그 빈자리를 네덜란드가 차지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교역이 애매해지자 당시 상업인으로서 굳건히 자리 잡은 네덜란드인이 보르도 와인의 중개무역을 담당한 것이다. 네덜란드 덕분에 백년전쟁 이후에도 보르도 와인은 영국 런던으로 갈 수 있었다.

    보르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산지는 메독(Medoc)이다. 프랑스 보르도 5대 와인 중 4개(샤토 무통 로칠드, 샤토 라피트 로칠드, 샤토 라투르, 샤토 마고)가 메독에서 만들어진다.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지롱드 강변 하구에 위치한 이 지역은 500년 전만 해도 갈대밭이었다. 하지만 당시 세계 최고 간척 기술을 지녔던 네덜란드인이 이곳을 포도밭으로 변신시켰다. 네덜란드인은 더 나아가 와인을 압축해 영국에 팔았다. 와인 증류주 ‘코냑’이 탄생한 순간이다. 코냑은 프랑스 지명이지만 결국 브랜디의 한 종류로 더 유명해졌다.

    코냑은 영어로 등급을 표기한다. 숙성 연도를 나타내는 표시가 대표적 예다. VS(Very Special)는 2년 이상 숙성시킨 원액을, VSOP(Very Special Old Pale)는 4년 이상, XO(Extra Old)는 10년 이상 숙성시킨 원액을 사용했다는 의미다. 오다주(Hors d’âge)라는 등급도 있는데 이는 XO 등급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최근에는 14년 이상 숙성시킨 원액을 사용한 XXO라는 새로운 등급도 등장했다.

    코냑의 등급 표기에 영어가 사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20세기 초까지 코냑의 최대 수출처가 영국인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포도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 영국 입장에서 프랑스 와인과 코냑은 최고 사치품 가운데 하나였다. 헤네시는 1818년 영국 웨일스의 왕자(이후 영국 조지 4세)에게 헌상하고자 특별한 술을 만들었는데, 이 술 이름이 ‘V.S.O.P’였다. 오늘날 코냑 등급의 시작을 알린 술인 셈이다.

    코냑 지방은 샤랑트강이 대서양까지 연결된다. 네덜란드인은 샤랑트강 하구인 라로셸(La Rochelle)에서 주로 소금을 거래했으며 와인 역시 교역 품목에 포함됐다. 하지만 네덜란드 상인이 맡은 와인은 풍미가 약하고 품질이 떨어져 저장에 문제가 있었고 클레임이 끊이지 않았다. 고민 끝에 이들이 선택한 방식은 바로 와인을 증류하는 것이었다.

    증류를 하니 술 무게가 줄어들었고 알코올 도수는 높아졌다. 도수가 높아진 덕분에 술이 상할 염려가 사라졌고 좀 더 편하게 교역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 상인은 선착장에서 증류주를 하역한 후 여기에 물을 추가해 와인처럼 팔았다. 마치 무거운 파일을 압축해 전자메일로 보내는 것과 같았다. 네덜란드 상인은 좋은 와인은 좋은 와인대로 열심히 팔았다. 루아르 계곡의 질 좋은 와인과 보르도 와인이 여기에 속했다. 고가 와인은 그대로 팔되, 품질이 낮은 와인만 증류주로 파는 식으로 투 트랙 전략을 펼친 것이다.

    전쟁과 비즈니스는 별개

    페르디난드 볼(Ferdinand Bol)이 그린 네덜란드 와인 상인회 지도부 단체 초상화. [GettyImages]

    페르디난드 볼(Ferdinand Bol)이 그린 네덜란드 와인 상인회 지도부 단체 초상화. [GettyImages]

    코냑이 번성하기 시작한 17~18세기 유럽은 구교와 신교, 부르봉 왕조와 합스부르크 왕조, 영국과 프랑스 간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실질적인 세계대전으로 불리는 30년 전쟁은 물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등이 끝없이 이어졌다. 혼란한 시기였지만 네덜란드 상인은 특유의 상인 정신으로 줄타기를 하며 비즈니스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특히 코냑이 영국에 많이 수출됐다. 당시 영국은 위스키 산업이 아직 확산되지 않은 탓에 세계 최대 코냑 소비처였다.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652년부터 1674년까지 3번에 걸쳐 분쟁이 있었고, 1780년부터 1784년까지도 다툼이 이어졌다. 하지만 양국은 본토를 침략하지는 않았으며, 명예혁명 이후 영국은 네덜란드 귀족인 윌리엄 3세를 왕으로 초빙하기까지 했다. 전쟁과 비즈니스를 철저히 구분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 사람들은 코냑을 적게 마신다는 사실이다. 연간 450만 병가량 소비하는데 영국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규모다. 미국과 중국이 코냑을 칵테일 형태로 다양하게 즐기는 것과도 대조된다. 전문가들은 프랑스 사람들이 격식을 지나치게 따지느라 트렌드에서 멀어진 것이라고 본다. 오늘날에도 코냑은 국내 소비보다 수출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 역시 등급 표기를 영어로 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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