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에 등장하는 퀴어 코드에 대해 ‘퀴어베이팅’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GETTYIMAGES]
케이팝 곳곳에 드러나는 퀴어 메시지
퀴어 코드는 케이팝에서 낯설지 않다. 지금 해외에서 케이팝과 관련해 논하기도 하는 소위 ‘대안적 남성성’이라는 것도 1세대 아이돌 시대에 시작됐고, 동성 간 감정을 자주 이야기하는 ‘팬픽’(팬 픽션(fan fiction)의 줄임말로 팬이 만든 2차 창작물)도 마찬가지다. 기획자와 창작자들은 점차 케이팝 콘텐츠 안으로 팬픽 정서와 기호를 끌어들이기도 했다.보깅(성소수자에 의해 시작된, 패션모델 같은 걸음걸이나 몸짓을 흉내 낸 디스코 댄스)이나 드랙(이성의 복장 또는 동성애자의 여장을 의미) 등 퀴어 커뮤니티에서 출발한 문화가 차용되는 일도 있다. 또한 무지개 패턴이나 퀴어 문화와 접점을 가진 구호들(이를테면 “사랑은 색맹이다”)이 장식적으로, 혹은 그 이상의 존재감을 갖고 콘텐츠에 등장하기도 했다. 물론 이 중 대부분은 퀴어와 관련성을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성소수자에 대한 연대 메시지라거나 다양성 예찬이라는 정도의 비교적 온건한 언급도 무척 드물다. 그러니 단지 매력적인 기호를 활용했거나 예쁜 티셔츠를 입었을 뿐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퀴어들의 관심을 끌 만한 여지만 던져주고 내용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상술, 이른바 ‘퀴어베이팅(queerbaiting)’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사실 케이팝의 많은 것이 그렇다. 누구에게도 결정적으로 밉보이지 않는 안전제일주의를 넘어서, 작은 빌미라도 있다면 삭제하고 표백하는 것이 일반적 세계다. 정치적 입장 표명은 당연히 금기다. 케이팝의 완벽성은 그렇게 달성된다. 그러면서도 긴박하고 혁명적인 이미지는 ‘멋지기 때문’에 자주 사용된다. 케이팝 뮤직비디오에서 신호탄을 쏘아 올리거나 기동타격대에 쫓기는 장면을 모두 세어본다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그들이 무엇에 저항하는지는 아무도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다. 공허하다면 공허한 일이다. 그러나 그 덕분에 흑인 인권운동이나 홍콩 민주화 시위를 비롯해 세계가 격동하는 현장에 케이팝이 울려 퍼지는 아이러니도 생겼다. 메시지는 없이 제스처만 있는 케이팝식 혁명이 어디서든 배경음악으로 어울리기 때문이다.
어린이집이나 유아 장난감이라면 모를까, 대중문화에 무지개가 등장한다면 단지 예쁜 장식만은 아니다. 더구나 해외 팬들의 존재가 분명해지고 성소수자 집단의 뜨거운 케이팝 애호가 잘 알려진 지금, ‘퀴어 코드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을 아무 의식 없이 사용하는 케이팝 기획자나 아티스트는 많지 않아 보인다. 누군가는 꼭 전하고 싶은 말을 작품에 담기도 한다는 점만은 케이팝도 다른 창작물 세계와 다르지 않다. 해당 작품이 상술인지, 메시지인지는 각자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언젠가 우리가 더 열린사회를 살아간다면, 그때 케이팝과 퀴어 코드의 관계는 또 달라질지 모른다. 그때까지는 케이팝 메시지의 흔적을 살피며 진실게임을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