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쇠 솥
양평 길 주방기구종합백화점
수만 종류 그릇의 다정한 반짝임과 축제들 속에서
무쇠 솥을 사 몰고 왔다
―꽃처럼 무거웠다
솔로 썩썩 닦아
쌀과 수수와 보리를 섞어 안친다
푸푸푸푸 밥물이 끓어
밥 냄새가 피어오르고 잦아든다
그사이
먼 조상들이 줄줄이 방문할 것만 같다
별러서 무쇠 솥 장만을 하니
고구려의 어느 빗돌 위에 나앉는 별에 간 듯
큰 나라의 백성이 된다
이 솥에 닭도 잡아 끓이리
쑥도 뜯어 끓이리
푸푸푸푸, 그대들을 부르리
― 장석남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 2012)에서
김이 모락모락 구수한 밥 냄새
방학이었다. 맞벌이부부는 아이를 시골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가차도 없고 여지도 없었다. 아이는 괜히 눈물이 났다. 시골에 가는 게 외딴섬으로 유배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방학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친구들은 아마 나를 잊어버릴 거야. 아이는 걱정 때문에 밤에 잠도 자지 못했다. 아이는 부모의 말을 잘 듣겠다고 사정사정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문득 ‘엄마 찾아 삼만 리’에 나오는 마르코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떠나는 날까지 입맛이 없었다.
시골에 가는 차 안에서 아이는 펑펑 울었다. 우는 아이에게 엄마는 햄버거를 사주었다. 꺼이꺼이 울면서도, 아이는 목구멍 뒤로 빵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고기는 놀라우리만치 부드러웠고 양상추는 씹을 때마다 속삭이듯 사각거렸다. 새콤달콤한 케첩과 마요네즈는 혀의 운동을 쉬지 않고 자극했다. 기분이 좋아진 아이는 어느새 울음을 뚝 그치고 말았다. 여느 아이들처럼, 아이도 햄버거를 좋아했던 것이다.
시골에 도착했다. 아이는 그제야 다른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시골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할머니가 마당에서 커다란 “무쇠 솥”을 닦고 있었다. 갑자기 아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는 태어나서 그렇게 큰 통은 처음 보았다. 냄비나 그릇이 그렇게 클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졌다. 그러나 무쇠 솥은 함지박보다 훨씬 더 컸다. 무쇠 솥에 들어가는 상상을 하자 머릿속이 일순 뿌예졌다. 정신을 차리려 아무리 애써도 무쇠로 만든 것은 로봇 외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날부터 아이는 자연스럽게 “쌀과 수수와 보리를 섞어 안친” 밥을 먹게 됐다. 아이는 무쇠 솥 뚜껑을 여는 순간을 특히 좋아했다. 검은콩이 잔뜩 들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멍든 밥처럼 보여서 아이는 콩밥을 싫어했던 것이다. 볼이 점점 부풀어 오르다가 침이 꼴까닥 넘어갈 때, 아이는 자기의 키가 자라는 것 같았다. 더불어 김이 모락모락 난다는 게 어떤 건지, ‘모락모락’이라는 부사가 얼마나 식욕을 돋우는지 몸소 알게 됐다. “푸푸푸푸 밥물이 끓어” 넘치는 순간의 아찔함을 가슴속에 조마조마함으로 새겨두었다. 그렇게 순간을 기억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 더는 시골이 싫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아이는 좀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발걸음이 무겁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단박에 알 것 같았다. 어떤 감정은 “꽃처럼 무거”울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그날, 할머니가 아이에게 지어준 미소는 “다정한 반짝임”으로 가득했다. 방학이 끝나자 “밥 냄새”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냄새가 됐다. “푸푸푸푸”의 주술 때문인지 햄버거보다 밥을 더 좋아하게 됐다. 집에서는 전기밥솥으로 지은 밥을 먹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언제나 커다란 무쇠 솥을 떠올렸다. 그 밥을 먹고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대들을 부르”기 위해, 밥 대신 시를 짓는 시인이 됐다.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양평 길 주방기구종합백화점
수만 종류 그릇의 다정한 반짝임과 축제들 속에서
무쇠 솥을 사 몰고 왔다
―꽃처럼 무거웠다
솔로 썩썩 닦아
쌀과 수수와 보리를 섞어 안친다
푸푸푸푸 밥물이 끓어
밥 냄새가 피어오르고 잦아든다
그사이
먼 조상들이 줄줄이 방문할 것만 같다
별러서 무쇠 솥 장만을 하니
고구려의 어느 빗돌 위에 나앉는 별에 간 듯
큰 나라의 백성이 된다
이 솥에 닭도 잡아 끓이리
쑥도 뜯어 끓이리
푸푸푸푸, 그대들을 부르리
― 장석남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 2012)에서
김이 모락모락 구수한 밥 냄새
방학이었다. 맞벌이부부는 아이를 시골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가차도 없고 여지도 없었다. 아이는 괜히 눈물이 났다. 시골에 가는 게 외딴섬으로 유배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방학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친구들은 아마 나를 잊어버릴 거야. 아이는 걱정 때문에 밤에 잠도 자지 못했다. 아이는 부모의 말을 잘 듣겠다고 사정사정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문득 ‘엄마 찾아 삼만 리’에 나오는 마르코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떠나는 날까지 입맛이 없었다.
시골에 가는 차 안에서 아이는 펑펑 울었다. 우는 아이에게 엄마는 햄버거를 사주었다. 꺼이꺼이 울면서도, 아이는 목구멍 뒤로 빵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고기는 놀라우리만치 부드러웠고 양상추는 씹을 때마다 속삭이듯 사각거렸다. 새콤달콤한 케첩과 마요네즈는 혀의 운동을 쉬지 않고 자극했다. 기분이 좋아진 아이는 어느새 울음을 뚝 그치고 말았다. 여느 아이들처럼, 아이도 햄버거를 좋아했던 것이다.
시골에 도착했다. 아이는 그제야 다른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시골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할머니가 마당에서 커다란 “무쇠 솥”을 닦고 있었다. 갑자기 아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는 태어나서 그렇게 큰 통은 처음 보았다. 냄비나 그릇이 그렇게 클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졌다. 그러나 무쇠 솥은 함지박보다 훨씬 더 컸다. 무쇠 솥에 들어가는 상상을 하자 머릿속이 일순 뿌예졌다. 정신을 차리려 아무리 애써도 무쇠로 만든 것은 로봇 외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날부터 아이는 자연스럽게 “쌀과 수수와 보리를 섞어 안친” 밥을 먹게 됐다. 아이는 무쇠 솥 뚜껑을 여는 순간을 특히 좋아했다. 검은콩이 잔뜩 들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멍든 밥처럼 보여서 아이는 콩밥을 싫어했던 것이다. 볼이 점점 부풀어 오르다가 침이 꼴까닥 넘어갈 때, 아이는 자기의 키가 자라는 것 같았다. 더불어 김이 모락모락 난다는 게 어떤 건지, ‘모락모락’이라는 부사가 얼마나 식욕을 돋우는지 몸소 알게 됐다. “푸푸푸푸 밥물이 끓어” 넘치는 순간의 아찔함을 가슴속에 조마조마함으로 새겨두었다. 그렇게 순간을 기억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 더는 시골이 싫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아이는 좀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발걸음이 무겁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단박에 알 것 같았다. 어떤 감정은 “꽃처럼 무거”울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그날, 할머니가 아이에게 지어준 미소는 “다정한 반짝임”으로 가득했다. 방학이 끝나자 “밥 냄새”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냄새가 됐다. “푸푸푸푸”의 주술 때문인지 햄버거보다 밥을 더 좋아하게 됐다. 집에서는 전기밥솥으로 지은 밥을 먹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언제나 커다란 무쇠 솥을 떠올렸다. 그 밥을 먹고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대들을 부르”기 위해, 밥 대신 시를 짓는 시인이 됐다.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