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의 거장’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는 늘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만든다. 어쩌면 당연한 문제를 잊거나 무시하는 우리의 ‘편리한’ 망각과 이기주의를 되비추기 때문일 테다. 아이(자식)들이 방기되고 있는 엄연한 현실에 대한 무시(‘자전거 탄 소년’), 더 높은 급여를 위해 동료의 정리해고를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합리적’ 이기주의(‘내일을 위한 시간’) 등 다르덴 형제는 늘 영화를 통해 직면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치부를 드러냈다. 신작 ‘언노운 걸’이 제기한 문제는 우리의 죄의식이다. 아니, 죄의식이 사라져가는 세상에 대한 호소다.
의사 제니(아델 에넬 분)는 하층민이 사는 지역의 조그만 1인 병원에서 일한다. 노인, 외국인 환자가 주로 방문하는 병원이다. 선임의사 말대로 의료수가도 대단히 낮다. 제니는 조건이 좋은 병원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곧 이직할 예정이다. 그런데 그만 생각지 못한 사고를 만난다. 근무시간 이후 누군가 병원 벨을 눌렀지만 응답하지 않았는데, 벨을 눌렀던 이가 다음 날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피해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아프리카계 흑인 소녀다.
다르덴 형제가 먼저 질문하는 건 제니의 행위가 죄가 될 수 있느냐다. 경찰은 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이 죄가 될 수는 없다며 슬픔에 빠진 제니를 위로한다. 선임의사, 수련의 등 제니의 주변 인물도 그를 죄인으로 보지 않는다. 사망한 소녀의 매매춘 사실도 드러난다. 사망사고가 제니 때문에 발생한 건 아니라고 얼마든지 합리화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소녀의 죽음에 직접 관여한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제니는 극심한 죄의식을 느낀다. 문만 열어줬으면 이런 불행은 없었을 것이라고 자책한다. 제니는 피해자의 신원을 알아낸 뒤 공동묘지에 임시로 묻혀 있는 그를 제대로 매장하려 한다. 제대로 된 장례, 그것이 사자(死者)에 대한 예의라고 본 것이다.
제니의 행위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안티고네와 비교된다. 국가에 해가 되는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오빠의 시체를 황야에 버리라는 왕의 명령(인간의 법)에 죽은 사람을 제대로 매장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신의 법)라고 맞선 인물이 안티고네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는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압축적으로 그리고 있다. 결국 안티고네는 장례의 대가로 목숨을 내놓는다.
‘언노운 걸’의 제니도 사람의 도리를 지키려 하자 여러 어려움에 봉착한다. 오래된 환자들과 사이가 틀어지고, 소녀와 관련된 조폭이 협박하며, 심지어 경찰마저 수사에 방해되니 이 일에서 빠지라고 경고한다.
제니의 행위에서 적잖은 관객이 ‘세월호 상황’을 떠올릴 것이다. 죄의식을 느끼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제대로 매장하려는 당연한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세월호 상황’이 압도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서다. ‘언노운 걸’은 최종적으로 묻는다. 우리가 죄의식이라는 감정마저 잊고, 혹은 잊은 듯 스스로를 속이며 사는 건 아닌가.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이렇게 당연한 질문으로, 그렇지만 잊고 있던 질문으로 우리를 뒤돌아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