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7일 중국 베이징 국립박물관에서 개최된 공자 전시회 [신화=뉴시스]
자주 인용되는 논어 구절 중 하나가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뜻의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다. 그렇다면 그렇게 간절히 간구하는 깨달음(道)의 실체는 무엇인가. 논어에는 이에 대한 딱 부러진 언급이 없다. 그저 어진 사람이 되는 것 또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란 뜻의 ‘인(仁)’ 아니면 만물에 내재된 사물의 본성을 뜻하는 ‘성(性)’으로 풀어낼 때가 많지만 여전히 아리송할 때가 많다.
논어에는 그런 도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대한 힌트는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논어의 맨 마지막 구절에 해당하는 요왈(堯曰)편 3장에 등장하는 공자의 최후진술이다.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 예를 알지 못하면 몸 둘 곳이 없다.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子曰 不知命 無以爲君子也,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言 無以知人也).”
3차원의 깨달음
공자 조각상 [pxhere]
먼저 명(命) 예(禮) 언(言)을 동양의 삼재(三才)로 불리는 천(天) 지(地) 인(人)에 대응시켜보자. 그와 더불어 앎의 주체로서 나를 대입해보자. 지명은 하늘(天)과 나의 관계맺음에 대한 이해이니 곧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사명과 한계에 대한 자각을 뜻한다. 동양사상에서 천(天)은 곧 시(時)이니 내가 처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인식, 곧 ‘시대정신(Zeitgeist)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 내가 실현해야할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를 자각해야한다는 말이 된다.
동양사상에서 지(地)는 곧 공간을 뜻한다. 예를 모르면 몸 둘 곳이 없다한 것은 곧 예가 나와 내가 처한 공간에 대한 관계맺음에 대한 이해로 새길 수 있다. 따라서 지례는 땅(地) 곧 지상에 세워진 문명세계의 원리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공동체의 운영원리이자 윤리규범으로서 에토스를 터득하고 그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뜻을 펼쳐야한다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타인(人)과 나의 관계맺음,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최선의 징검다리가 언어라는 깨달음이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단편적으로만 접하면 논어는 언어에 대한 불신과 염오로 가득한 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말만 번드르르한 교언영색(巧言令色)을 질타하고, 말은 어눌해도 행동은 민첩한 눌언민행(訥言敏行)을 군자의 덕목으로 꼽은 공자 아니던가.
그런 그가 논어의 말미에서 언어를 모르면 인간을 알 수 없다고 천명하다니. 공자가 필생의 과업으로 여겼던 좋은 정치란 곧 소통의 기술이며, 소통은 결국 언어를 통해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역설적 깨달음의 반증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종합하면 논어에서 말하는 도(道)의 내용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을지언정 그 형식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이를 지상의 척도에 맞춰 실현할 방도를 찾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의 끈으로 언어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 깨달음에 이른 공자의 나이
지언(知言)의 경지에 이른 나이가 언제냐가 가장 어렵다. 언어와 관련지어봤을 때 어떤 말을 들어도 거슬림이 없어졌다는 이순(耳順)이 가장 가깝다. 이에 따르면 예순의 나이에 언어에 통달하게 됨으로써 타인과 의사소통에 막힘이 없게 됐다고 새길 수 있다. 이를 다시 종합해보면 지례(서른)-지명(쉰)-지언(예순)의 순서가 되니 지언이 가장 어려운 셈이다.
그렇다면 논어에서 공자의 언어사용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공자는 같은 질문을 받고도 질문한 사람이 누구고 그가 처한 상황이 어떠냐에 따라 전혀 다른 답을 내놓기 일쑤였다. 정치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노나라의 권세가 계강자에겐 “바르게 하는 것”이라 했지만 초나라의 야심가 섭공에겐 “가까이 있는 자들을 기쁘게 하고, 먼 곳에 있는 자들은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라 답했다. 전자에겐 정치의 올곧음을, 후자에겐 정치의 후덕함을 강조한 것이다.
또 제자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자로에겐 “솔선수범하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것”이라고 짧게 답한 반면 자장에겐 “다섯 가지 미덕을 존중하고 네 가지 악덕을 물리치라”며 무려 9개에 달하는 지침을 전했다. 우직한 초년제자에겐 단순명쾌한 답을 주고 영특한 말년제자에겐 주도면밀한 답을 준 것이다.
이렇듯 공자에게 언어는 고정적인 게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다. 악보에 맞춰 적확한 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사람에 따라 끊임없이 변주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는 보편적 답안이 아니라 상대의 영혼을 격동시키며 자문자답케 하는 것이다.
‘논어’라는 제목이 말해주는 것
중국 베이징에 있는 공자사당에서 열린 2567번째 공자 생일 기념식 [AP=뉴시스]
그런 점에서 공자의 ‘논어’야말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한다’는 명제로 끝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격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무리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곡진한 마음을 담아 대화에 대화를 거듭하다보면 내적인 깨달음과 외적인 소통의 순간이 도래하리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논어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끊임없이 논어를 인용하고 또 인용하는 무의식적 이유 역시 거기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