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 시대다. 음악계도 예외는 아니다. 산업적, 문화적 측면에서 아이돌의 비중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아이돌의 특성은 ‘기획’에 있다. 자본, 즉 기획사가 주체가 돼 연습생을 선발하고 훈련시켜 그룹을 만든다. ‘음악 창작자’라는 개념이 지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는 시스템이다.
아이돌 반대편에 ‘인디’가 있다. 인디에 대해선 여러 정의가 있다. 원래는 독립유통음반을 의미한다. 유니버설, 소니 BMG, 워너, EMI 같은 메이저 레이블이 사실상 음악 유통을 장악하는 미국, 영국 등에서 독자적인 제작, 유통 시스템을 갖춘 레이블을 ‘인디 레이블’이라 불렀다. 인디 레이블에 소속돼 활동하는 뮤지션은 인디 뮤지션이 됐다.
인디 레이블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메이저 레이블 소속 뮤지션과 달리 판매와 활동 면에서 열악했으나, 그 대신 음악 창작의 자유가 있었다. 따라서 주류 음악이 할 수 없는 온갖 실험을 할 수 있었다. 대중음악 미학의 발전에는 일정 부분 인디 레이블과 인디 뮤지션의 실험 성과가 기여했다.
‘인디’라는 용어는 1990년대 중반 한국에 이식됐다. 서울 홍대 앞을 중심으로 펑크나 얼터너티브 등을 연주하는 밴드가 등장하고 그들이 공연하는 클럽이 각광받기 시작할 때였다. 당시 한국에는 메이저 소속사나 레이블 시스템이 자리 잡지 못했다. 음반산업은 주먹구구식이었고 영세 기획사가 난립했다.
인디가 메이저의 대척점에서 출발했음을 상기해보면, 애당초 한국에서 인디는 본래 의미를 유지한 채 이식되기는 어려운 개념이었다. 당시 인디 담론을 주도하던 측은 과거 운동권 출신이었다. 그들은 인디에 정치적 함의를 부여했다. ‘문화 게릴라’라는 프레임은 이 때문에 설정됐다. ‘획일화된 대중음악에 저항하는 진짜 음악’이라는 포장도 씌워졌다. 물론 완전히 틀린 해석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게 인디 음악의 전부도 아니었다.
이러한 인식이 조금씩 바뀐 것은 ‘인디’라는 개천에서 용이 나면서부터다. 크라잉넛, 노브레인, 언니네 이발관, 델리스파이스 같은 밴드들은 지상파 TV에도 진출했고, 음반도 제법 팔았다. 이때부터 인디는 실력파 뮤지션을 지칭하는 단어가 됐다. 그리고 신인가수가 데뷔하면 그들의 실력을 증명하는 수사로 ‘홍대 인디밴드 출신’이라는 문구가 보도자료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계속 고만고만한 스타가 배출됐고 1세대를 뛰어넘지 못했다.
상황이 바뀐 것은 2008년 이후부터다. 데뷔 앨범을 내기도 전 스타덤에 오른 장기하와 얼굴들은 다시 인디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했다. 요조, 국카스텐, 검정치마, 브로콜리 너마저 등 새로운 세대의 뮤지션도 나름의 지분을 확보했다. 사람들은 다시 인디 음악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당시 인디 음악은 ‘문화 게릴라’의 음악도, ‘실력파’의 음악도 아니었다. 그냥 인디 음악이었다. 개념은 사라졌다.
지금 인디의 핵심에는 창작이 있다. 각종 음악 관련 차트 및 미디어를 보면 힙합을 제외하고 자기 음악을 만들고 부르는 이를 인디로 통칭한다. 지금 한국 인디는 엔터테인먼트로서 음악만 있고 창작으로서 음악은 도외시되는 기형적 시장 구조를 비추는 거울 노릇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