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신문 683호의 ‘아줌마 일기’에 실린 김혜기씨의 글이다. 이 글에서 김씨는 축구에 열광하는 친구에게 “친척 중에 축구선수 있니?” 하며 냉소했던 자신이 아이들과 붉은색 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는 ‘붉은 악마’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재미있게 풀어놓고 있다.
월드컵은 참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대한민국 국민 6명 중 1명이 참가했다는 장대한 거리응원의 물결도, 처음 목표했던 16강 진출을 넘어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4강 진출의 위업을 이룬 대표선수들의 투혼도 희망의 기억으로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연예인과 다른 순수한 매력”

그동안 축구의 ‘ㅊ’자만 나와도 고개를 저었던 여성들이 과연 어떻게 해서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울고 웃는 열성팬이 되었을까. 디자이너 이진숙씨는 ‘원초적인 섹시함’에 그 이유를 둔다. 고화질의 TV 화면에 생생하게 잡힌 선수들의 역동적인 근육과 땀방울은 탤런트나 가수 등 기존 연예인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부분이라는 것.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젊음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연예인들은 멋지기는 하지만 대중과는 유리된 존재잖아요. 하지만 축구선수들에게서는 섹시하면서도 가식 없는 순수함을 볼 수 있었어요.”

이처럼 그라운드를 누비는 축구선수들에게서 ‘순수한 섹시함’을 느꼈다거나,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감의 극치(오르가슴)을 맛보았다는 여성들도 적지 않다. 축구를 남성적인 힘의 상징으로 여기면서 ‘저급한 마초’정도로 취급했던 페미니스트들이 월드컵에 열광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축구가 남자들의 경기이기 때문에 더멋있다는 견해도 있다. 외국인 은행에 근무하는 정혜원씨는 ‘만약 축구가 여자들의 경기였다면 그렇게 재미있다고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전에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축구경기나 축구선수들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죠. 그래서 그 매력도 몰랐던 것 같아요. 승리가 주는 자랑스러움도 있고요. 왜 여자들이 더 열심히 응원했냐고요? 우리나라 여자들은 원래 남자보다 더 솔직하고 적극적이지 않나요?”

“이탈리아전이 끝나고 황선홍 선수가 히딩크 감독을 포옹하기 직전의 표정 보셨나요? 그야말로 ‘우리는 생사고락을 함께해서 여기까지 왔죠’ 하는 표정. 사랑하는 전우를 껴안는 듯한, 아니 전우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는데 굉장히 감동적이었어요.”(류지선·인터넷 ID Carlene)
나이와 세대를 막론한 여성들의 적극적인 응원에 대다수 전문가들은 긍정적 시선을 보내고 있다. 현실문화연구 조윤주 편집장은 거리에 나선 과감한 ‘그녀들’을 보면서 통쾌했다고 말한다. “거리응원전이 억눌렸던 감정과 스트레스의 해방구임은 부인하지 않아요. 특히 여자들에게는 일탈의 욕구를 분출할 기회였어요. 혼자서는 엄두도 내기 어려웠던 행위를 여럿이 모인 김에 확 풀어버릴 수 있었죠.”

사실 이번 월드컵에 열광했던 여성들이 지속적으로 축구 애호가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여성들이 환호한 것은 축구보다는 그동안 자신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집단행동의 자유’일 수도 있다. 연세대 황상민 교수(심리학)는 여성들의 열광은 축구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축제를 즐기고 싶은 마음에 가깝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과거 한국 사회에서 일어났던 집단행동은 대부분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한 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정치적 견해가 없는 여성들에게 이 같은 시위행렬에 가담할 기회는 거의 없었죠. 반면 아무런 이념이나 위험이 없는 축제인 월드컵은 여성들이 마음놓고 참여할 수 있는 말 그대로의 ‘카니발’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들이 열광한 대상이 축구든 축제든 간에, 이래저래 월드컵은 ‘붉은 악녀’들에게는 곱절로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집단행동과 축구 두 가지 다 남성들에게는 별반 새로울 것이 없었던 반면(지난 87년 거리에 나섰던 ‘넥타이 부대’를 생각해 보라!), 여성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난생 처음 겪는 일들이니 그 즐거움도 배가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나 이번 거리응원에서 여성들이 특별하게 더 두드러진 것은 아니었다는 시각도 있다. 축구칼럼니스트인 숭실대 장원재 교수(문예창작)는 “남자들이 목소리로 응원했다면 여자들은 도구와 패션, 표정으로 응원했다”고 평했다. 또 조선시대 여성사 연구가인 정지영씨(서강대 강사·한국사)는 “여성들의 옷차림이나 차 위에서 춤추는 모습 등 자극적인 장면만 골라 전달한 언론의 시각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여자들이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여자들도 그렇게 한 것뿐이죠. 여자만 따로 떼어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요?”

결국 ‘붉은 악녀’들의 열정은 여성만의 힘이라기보다는 ‘월드컵 세대’ 또는 ‘W세대’로 불리는 젊은 세대의 힘과 열정이다. 이 긍정적 에너지가 사상 유례없는 축제의 장을 맞아 마음껏 펼쳐진 셈이다.
주간동아 342호 (p68~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