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방선거, 8·8 보궐선거, 대통령선거 등 올해 3개의 ‘빅게임’에서 한나라당은 먼저 ‘1승’을 거뒀다. 그것도 압승이었다. 지방선거 다음날(6월14일), 민주당 박용호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함으로써 한나라당은 저절로 원내 과반의석을 확보했다. 서울시장, 국회의장, 대통령 등 3대 선출직 중 서울시장은 이미 틀어쥐었고 국회의장직도 갖고 갈 가능성이 높다. 6월17일 여론조사에선 ‘보너스’까지 터졌다.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10%포인트 이상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와대는 더욱 고립무원이 됐다. 국가권력 행사 수단, 여론의 지지 등 양면에서 영향력은 거의 상실됐다. 당장 다음달부터 청와대는 안방인 서울에서 ‘고건’이 아닌 ‘이명박’을 상대해야 한다. 정부 각 부처의 ‘최종 결재권자’는 사실상 입법권을 쥔 한나라당이 됐다. 임기 7개월 남은 청와대의 역할은 ‘통치철학’이 반영되는 정책결정 대신 ‘행정관리’로 절하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지금 한국은 청와대와 한나라당, 적대적인 정파가 함께 통치하는 ‘코아비타시옹’(동거 정부)의 나라가 됐다.

한나라당 고위 당직자 A씨는 “당 내부에서 전략적 변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검찰 지청장에게 청탁전화를 하고, ‘깽판’이라고 말하고, ‘YS 시계’를 꺼내 YS에게 보여주는 등 스스로 ‘자충수’를 뒀다는 게 A씨의 지적. 한나라당은 노무현 공세는 지방선거용이 아니라 대선용이어서 지방선거 이후 별도로 시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선거 결과가 ‘노후보 위기’로 결론나자 한나라당은 이를 수정해 노후보 직접 비판은 계속 자제하기로 했다. 민주당은 자중지란에 빠지는 모습인 반면, 한나라당은 정책정당의 모습으로 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킬 기회라는 것. 최근 자신감이 더 굳어져 ‘파트너’를 바꿀 필요가 없다는 심리도 숨기지 않는다.
한나라당은 역대 대선 직전 ‘여론조사 2등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질 때 반드시 유력한 제3후보가 출현한 점에 주목한다. 92년 대선을 앞두고 2등은 김대중 후보, 3등은 정주영 후보였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2등은 이회창 후보, 3등은 이인제 후보였다. 3자가 모두 출마할 경우 제3후보의 출현은 여야에 관계없이 1등 후보의 당선에 더 도움이 됐다는 분석이다. 한나라당이 ‘2등 후보 노무현’의 낙마를 원치 않고 있다는 정황은 여기서도 읽힌다.

한나라당 이성헌 의원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탈당해 참여하지 않는 한 민주당의 후보교체나 신당 창당은 대선 결과에 변화를 주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당에서 탈당할 의원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론적으로 한나라당은 노무현 후보나 제3후보, 신당과 경쟁해도 현재의 우위를 지켜낼 수 있다고 자체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한나라당의 ‘낙관론’은 DJ 공격 효과에 대한 자신감에 근거한다. “우리는 DJ 아들들과 친인척의 비리를 대선 때까지 계속 부각할 것이다. 상대측에서 어떤 후보를 내세우고 어떠한 형태의 신당을 만들든 ‘DJ와 같이 일했던 조직과 인물 그대로의 DJ당, 위장 신당’이라는 논리를 펼 것이다.”(한나라당 고위 당직자) 한나라당은 과반의석을 확보한 이상 권력형비리 국정조사 등 계속 몰아붙일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갖고 있다.

강원도 춘천에서는 한나라당 유흥수 후보가 시장에 당선됨으로써 유후보가 갖고 있던 한나라당 지구당위원장 자리는 공석이 됐다. 이 지역 무소속 한승수 의원이 이 자리를 승계해 한나라당에 입당할 수 있는 환경이 무르익은 셈이다. 자민련에서도 한나라당 입당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의원들이 나오고 있다.
8월8일 재보궐선거엔 최대 13, 14석이 걸려 있다. 선거지역은 서울-경기-인천 지역이 8곳, 부산-경남 지역이 3곳, 호남지역이 2곳, 제주지역이 1곳으로 예상된다. 수도권에서 승률 50%만 거둬도 한나라당은 무승부를 이끌 수 있다. 당내에서 원내 과반의석의 지속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민련 고위 관계자는 “김종필 총재의 차기 국회의장 보장을 매개로 한 한나라당-자민련 합당안까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김총재는 당혹스러운 듯 6월17일 저녁 의원들을 소집해 단속에 나섰다. 그러나 이 자리가 ‘자민련 최후의 만찬’이 될 것이라는 예상까지 나온다. 한나라당은 자민련에 대한 ‘적대적 M&A’에 성공한다면 향후 여권 신당의 파괴력은 더 떨어진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거인’ 한나라당에도 아킬레스건은 존재한다. 이회창 후보가 또 한 번 개인적 구설수로 치명상을 입는다면 이후보의 구심력은 급속히 떨어져 한나라당이 흔들릴 공산이 크다. 이는 반창(反昌)연대 정계개편의 돌풍이 될 수 있다. 이후보 아들의 병역문제 진상조사를 맡은 민주당 함승희 의원은 “섣불리 건드리면 역풍을 맞을 수 있다”면서 신중론을 폈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이 대선정국에서 새롭게 나왔을 경우 사정은 달라진다.
대구시장 선거에서 무소속 이재용 후보가 40%대의 득표를 한 것도 한나라당을 내심 불안하게 한다. 이러한 현상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제3의 대선후보에 대한 적극적 호감으로 표출될 경우 대선 승리의 필요 충분조건인 ‘영남권 압승’에 비상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은 지명직 최고위원 선정, 당직인선, 선대본부 인선, 재보궐선거 공천 등을 앞두고 있다. 인사에서의 사소한 잡음 하나가 당을 뒤흔들 여지도 있다. 우선 마산-합포 재보궐선거에서의 김현철씨 공천이 쟁점으로 떠오른다. 이곳 경선에 출마하는 한나라당 맹형규의원실 강원석 보좌관은 “현철씨를 공천하면 한나라당 대선 패배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한나라당은 이미 지방행정-입법 등 국가권력의 절반쯤을 차지한 정당이다. 차기정권 창출에 가장 가까이 갔다. 그러나 지난 97년부터 지금까지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은 ‘우세를 유지하는 능력’을 한 번도 보여주지 못했다. 이들은 97년 대선 패배, 올해 초 이회창 대세론의 몰락 등 두 번이나 실패한 경험이 있다. 이후보측 양휘부 특보는 “이제는 다르다”고 말한다. 16곳 광역단체 중 11곳을 차지했고, 국정조사와 청문회라는 ‘강력한 무기’를 쥘 수 있게 됐으며, 상대 당은 자중지란에 빠져 있고, 자민련 몰락 등 정계개편의 파괴력이 약화된 데다 이회창 후보가 여론의 지지까지 완전 회복했다는 것이 그 근거다.
대선게임의 ‘후반전’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리드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재역전당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