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틀에 놓은 감자꽃(왼쪽)과 쑥갓꽃.
겉으로는 늙어가나 그래도 속을 들여다보면 그 나름 성장하지 않았나 싶다. 아이들이 산골에서 자라 삶이 안정되고, 이것저것 많은 걸 손수 하면서 자존감이 높아졌으며, 책도 몇 권 냈고, 몇 가지 주제로 강의도 가끔 다니는 편이다.
나는 어느새 환갑을 앞둔 나이가 됐다. 예전 같으면 자식들한테 하던 일을 물려주고 조금씩 인생을 정리할 나이.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그렇지가 못하다. 환갑이라고 말 꺼내는 것조차 쑥스럽지 않은가. 베이비붐 이후 세대에겐 앞으로 ‘노년’이란 게 없을지도 모르겠다. 100세 시대가 머지않았다. 평균수명이 길어지니 노년의 기준도 자꾸 바뀔 수밖에. 그런데 이게 양면을 갖는 거 같다. 축복일지, 재앙일지. 골골거리며 그냥 목숨을 이어가야 하는 장수라면 재앙에 가깝지 않을까. 반면 노년이 없다는 건 죽는 날까지 나이를 잊고, 활기차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건 축복이리라. 새삼 ‘생명’, 그 근본을 돌아보게 된다.
사람을 살리는 꽃
닭의장풀꽃.
새삼스레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꽃이 왜 좋을까. 꽃이 피는 순간은 생명 살이 과정에서 절정기. 암수가 만나 새로운 생명을 배는 창조의 순간이다. 꽃 둘레로 환한 생명 에너지가 퍼져 간다.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자연스러운 빛깔과 냄새로 행복을 맛보고, 치유 에너지를 얻는다. 뇌에서는 알파파가 증가한단다.
또한 꽃은 사람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생명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하고, 마무리해야 하는지, 또 창조란 무엇인지. 삶의 근본과 목적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한동안 야생화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사람이 공들여 재배하는 장미나 튤립이 왕 또는 지배층을 상징한다면, 들과 산에서 저절로 피는 애기똥풀이나 엉겅퀴 같은 야생화는 보통 사람을 상징한다.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꽃을 보는 눈도 달라진 셈이다. 그러면서도 야생화는 바쁜 우리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신비로움을 일깨워준다. 덩달아 관련 도감도 많이 나왔다.
여기에 견줘 정작 우리를 먹여 살리는 곡식이나 채소들이 피우는 꽃에 대한 관심은 적었다. 사실 농작물 꽃은 우리 식구나 다름없다. 아니, 그 이상이라 해야겠다. 사람한테 저들이 가진 모든 걸 나눠주니까. 그럼에도 ‘등잔 밑이 어둡다’고, 너무 익숙해서일까. 사람들은 잘 모른다. 농사짓는 나 자신부터 모르는 게 많으니까.
지구상에는 많고 많은 꽃이 있다. 육상 식물이 총 30만여 종 있는데, 이 중 26만여 종이 꽃을 피운다. 이 가운데 우리가 먹는 것은 몇 종이나 될까. 기껏 25종만이 우리가 채식으로 얻는 에너지의 90%를 제공한단다.
그렇다면 기꺼이 이런 식물들의 꽃을 알고, 사랑할 만하지 않겠나. 여기에다 의미를 좀 더 보태보자. 야생화가 ‘민주주의’라면 농작물 꽃은 ‘생명주의’라 불러도 좋으리라. 농작물 꽃은 대부분 그리 화려하지 않다. 수수하다. 심지어 우리가 거의 날마다 먹는 쌀이나 밀은 꽃이 있는 듯 없는 듯하다.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벼 역시 꽃을 피우고, 암술과 수꽃의 꽃가루가 만나야 우리가 먹을 양식이 된다. 우리가 먹는 쌀 한 톨 한 톨은 바로 벼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사랑을 나눈 결과다. 그렇다. 우리가 먹는다는 건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만은 아니다. 작물들이 서로 사랑한 그 결과를 먹는다. 우리가 ‘제대로 사랑을 나눈’ 작물을 먹는다면 우리 안의 사랑도 차곡차곡 쌓이지 않을까 싶다.
이쯤에서 생각을 확장해본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사람만 갖는 가치는 아닌 셈이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의 공통된 가치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짐승도, 식물도 다 사랑을 하니까. 그런 점에서 이 연재가 부족하나마 사랑을 돌아보고 되새김질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면 나한테는 큰 기쁨이 되겠다.
오이꽃.
이참에 나는 사람을 살리는 농작물 꽃들에 새롭게 이름을 붙여본다. 우리 목숨을 살려주니 ‘목숨꽃’이요, 밥상을 수놓으니 ‘밥꽃’이라 부르고 싶다. 우리가 날마다 먹는 밥을 사랑의 결과로 받아들이자. 쌀 한 톨과 무 한 뿌리에서 생명을 느끼고, 그걸 먹고사는 ‘나’를 좀 더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대하자. 그러다 보면 나와 가까운 가족, 나와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이웃이나 동료들도 더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