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7일 방송된 ‘무한도전 :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의 한 장면.
‘토토가’가 방송된 후 인터넷에는 단순한 시청후기를 넘어 흡사 간증 같은 글들이 올라왔다. ‘저 노래 안무가 어떤 거였더라 생각하는데 몸은 이미 춤을 따라 추고 있었다’ ‘김현정 노래하니까 엄마 아빠가 밥 먹다 말고 TV 앞으로 달려왔다’ 등등. ‘무한도전’의 시청률이 오랜만에 20%를 돌파했다는 사실은 ‘토토가’가 그 어떤 방송사의 연말 시상식보다 화제였음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
‘토토가’의 1990년대는 이전까지의 90년대와 다른 결을 갖고 있다. 2014년에 이르러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은 90년대에 대한 회고 말이다. 서태지, 유희열, 윤상, 김동률, 이적 등 이제 작가 반열에 오른 혹은 그렇게 대접받는 90년대 가수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다른 사람의 곡이 아닌 자신의 곡을 부르는 창작자라는 점이다(물론 유희열은 객원가수를 앨범에 끌어들인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TV보다 라디오, 행사보다 콘서트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들은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음악을 했고, 매스미디어(mass media)가 아닌 내로미디어(narrow media)를 통해 활동했으며, 불특정 다수가 아닌 확고한 팬들 앞에서 노래한 사람들이었다. 대중음악의 양대 속성을 예술성과 상업성으로 양분한다면 그들의 음악은 예술의 기준에 좀 더 부합하는 것이었다. 트렌드와 상관없이 충성을 버리지 않는 팬들에 더해 꾸준한 비평적 성취(그것이 호평이건 악평이건)와 함께 그들은 21세기에도 살아남았다. 아니, 1990년대보다 더 큰 영향력을 얻게 됐다.
‘토토가’의 1990년대는 그 반대편에 있다. 음악 순위 프로그램의 절대 강자였으며 쇼 무대를 독식하던 이들이 주인공이다. TV를 통해 ‘뿌려지는’ 그들의 춤과 음악은 라디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영향력을 누렸고, 밀리언셀러 시대에 이는 곧 ‘찍으면 최소 10만 장’이라는 지표로 이어졌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전파되고 음반 판매량으로 이어지는 순환 고리의 정점에 90년대 댄스음악이 있었던 셈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노이즈, 듀스 등 멤버 중 창작자가 있던 그룹을 제외하면 당시 댄스음악은 김창환, 윤일상, 최준영, 장용진, 주영훈 등 신진 작곡가가 노래를 공급해주는 장르였다. 가수는 가창과 퍼포먼스의 주체였으되 창작이라는 측면에서는 객체에 머물렀다. 달리 말하면 청각적 쾌감은 외부 작곡가가 담당하고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하는 것만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창작 역량보다 젊은 육체가 주무기였지만, 거꾸로 트렌드 변화나 육체의 노화와 함께 빠르게 과거로 밀려나는 동인이기도 했다. 대중은 좀 더 젊은 육체와 새로운 트렌드를 원하는 법이다. 싱어송라이터들이 자신의 음악에 익숙한 기존 팬들과 함께 21세기로 건너와 기성세대 자리에 안착하는 동안 댄스가수들은 21세기 신진 아이돌에 밀려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그럼 ‘토토가’는 그 과거를 아무 맥락 없이 현재로 소환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2000년대 중반 이후 1990년대의 댄스음악은 일종의 ‘성인 하위문화’로 소비되고 있다. 서울 홍대 앞에서 출발해 이제는 서울 곳곳은 물론 부산에까지 체인점을 낸 한 클럽은 철저히 90년대 댄스음악만 틀며 당시에 10대, 20대를 보낸 세대의 넥타이를 끌어당겼다. KBS 2TV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는 2012년 이미 ‘청춘 나이트’라는 기획으로 90년대 댄스 가수들을 섭외했고 이는 동명의 기획공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토토가’는 어떻게 이 하위문화를 단숨에 중심에 안착하게 했을까(다음 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