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지 케루비니와 서정시의 여신 뮤즈’, 장 오귀스트 앵그르, 1841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그래서인지 ‘유명 화가가 그린 작곡가의 초상’은 들라크루아가 그린 쇼팽, 그리고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이 그린 글린카와 무소르그스키의 초상화 정도가 전부다. 반면 오늘날에는 이름조차 낯선 작곡가인 루이지 케루비니(1760~1842)의 초상화를 장 오귀스트 앵그르(1780~1867)가 그렸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신고전주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앵그르는 당시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두 번이나 그렸을 정도로 명망이 대단한 화가였다. 그런 앵그르가 초상화를 그렸던 작곡가라면 케루비니 역시 적잖은 명성을 얻었음이 분명하다.
케루비니가 가진 명성은 다분히 그의 음악에 대한 나폴레옹의 선호 때문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인 케루비니는 프랑스 대혁명 직전인 1788년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조직한 오페라단의 지휘자로 임명됐다. 이듬해 혁명이 일어나면서 파리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그 와중에 케루비니는 1년 만에 왕비 오페라단 지휘자 자리를 잃었지만 변변한 음악가가 없던 프랑스에서 그의 이름은 이미 꽤 알려진 상태였다.
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로 등극하자 케루비니는 나폴레옹의 적대국가인 오스트리아 빈으로 피신했는데, 놀랍게도 1809년 군대를 끌고 빈에 진주한 나폴레옹은 케루비니를 찾아내 파리로 되돌아오라고 부탁했다. 나폴레옹의 부탁을 받아들여 파리로 돌아온 케루비니는 루이 16세 처형을 기념하는 ‘레퀴엠 C단조’를 써서 나폴레옹의 칭송을 받았다. 베토벤 역시 이 작품을 격찬하며 모차르트의 레퀴엠보다 나은 작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모스크바 원정과 워털루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한 나폴레옹은 황제 자리를 잃고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는 처지에 이르지만, 케루비니는 나폴레옹의 몰락과 상관없이 파리음악원 교장으로 20년 이상 재직하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명성을 누렸다. 파리의 다른 예술가들과 다양한 교우관계도 형성했다. 그중에는 바이올린 음악 애호가였던 앵그르도 포함돼 있었다. 여기 소개한 초상화는 케루비니가 타계하기 전해인 1841년 그린 것으로, 하프를 든 뮤즈가 미소를 지으며 우울한 표정의 작곡가를 막 축복하려 하고 있다.
‘그랑 오달리스크’ ‘터키탕’ 같은 여인의 관능적 누드 작품으로 잘 알려진 앵그르는 제우스나 아폴론 등 그리스 신화에 유난히 집착하던 화가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 등장인물은 한결같이 고대 그리스 조각을 모델로 한 듯 매끈하게 떨어지는 선과 대리석 같은 피부를 가진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앵그르는 단순히 작곡가의 모습만 그리지 않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음악의 수호신 뮤즈를 등장시켜 초상화의 모델이 음악에 종사하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케루비니를 우울해 보이는 표정으로 그린 것은 나폴레옹에게조차 “당신은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케루비니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슬쩍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