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한창 활동하던 시기의 노이즈가든.
“본선 당일 PD가 노이즈가든에게 곡 길이를 원곡의 절반인 5분으로 줄이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압력을 넣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 밴드는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시작된 연주. 병주는 곡을 줄이기는커녕 보란 듯이 무한정 솔로를 계속하는 정말 ‘그놈다운’ 사건을 벌였고, 이는 단순히 주최 측을 ‘엿 먹이는’ 깽판 차원을 넘어 객석에 있던 사람을 모두 일으켜 세우는 장관을 연출했다. 그렇게 그들은 거짓말처럼 대상을 타버리고 만다. 그 느리고 무거운 연주로 말이다.”
1996년 그들의 데뷔 앨범이 발매됐다. ‘말 달리자’가 최초로 수록된 크라잉넛과 옐로우키친의 합동 앨범 ‘Our Nation’, 언니네 이발관의 ‘비둘기는 하늘의 쥐’가 발표된 해다. 공연으로만 존재하던 홍대 앞 인디음악이 음반이라는 기록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해다. 그리고 ‘인디’라는 말이 일간지 문화면에 처음으로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군복무 중이던 나는 휴가를 나와 그 3장의 앨범을 사왔다. 모두, 충격이었다. 한국어로 된 펑크와 모던록을 듣는다는 건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한국어 랩을 들을 때의 느낌 같았달까. 하드록으로 분류할 만하던 노이즈가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통 록’에는 이미 익숙할 만큼 익숙했지만 기존 한국 밴드의 관습을 비켜가되 본질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똑같은 청바지라도 ‘핏(good fit)’을 살려 입은 청년을 처음 봤을 때의 신선함 같은 게 그들의 데뷔 앨범에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
록에 대한 당시의 전통 관념들, 즉 화려한 기타 솔로나 하늘을 뚫고 올라가는 보컬 샤우팅 같은 건 그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연주는 진중하고 무거웠다. 하지만 압도적이었다. 보컬은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힘차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헤비메탈의 황금기였던 1990년대 초반에 시작됐지만 ‘곡’의 힘을 중시하고 ‘비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했으며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있던 그들의 이 데뷔 앨범은 그래서 인디신(인디밴드가 활동하는 장소나 무대)의 여명기에 정확히 동기화됐다. 새롭되 단련됐으며 강하되 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노이즈가든은 홍대 앞에서 솟아오른 물줄기에 고까운 시선을 보내던 이들의 선입견을 깨부수는 철퇴였다.
그들은 1999년 2집 앨범을 끝으로 해체했다. 앨범 2장 모두 곧 절판됐다. PC통신을 중심으로 화제가 됐던 92년 데모 앨범까지 포함한 노이즈가든의 앨범 3장은 마니아가 애타게 찾는 아이템이었다. 그 3장의 앨범이 재발매됐다. 윤병주가 갖고 있던 마스터테이프를 기반으로 리마스터링을 거쳤다. 21세기 사운드로 돌아온 이 20세기 음악은 90년대 중반 시간에 머물지 않는다. 만약 이 앨범들이 지금 발매됐더라도, 나는 20대 초반에 느꼈던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명반의 조건이다. 5월 25일, 서울 홍대 앞 V홀에서 그들은 재발매 공연을 갖는다. 90년대 중반 홍대 앞을 기억하는 이들이 한데 모이는 자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