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드스톤 3집 앨범 ‘사이키문(Psychemoon)’ 재킷.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기타 히어로들의 시대에는 어느 정도 적당한 표현이기도 했다. 1절이 끝나자마자 장엄하고 화려한 기타 솔로가 등장하지 않으면 록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연주 ‘테크닉과 필링’을 송라이팅보다 중요하게 여기던 때였으니 말이다. 적어도 한국에선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음악이 한 세대에 동시에 소비되던 시절 이야기다. ‘그때도 아득한 과거가 되고 보니 그리워진다’ 유의 회고를 하려는 게 아니다. 써드스톤 3집 ‘사이키문(Psychemoon)’을 듣는, 그 시대를 거쳐온 음악 애호가라면 누구나 그 시절을 문득 떠올릴 수밖에 없을 거라는 말이다.
지미 헨드릭스의 ‘Third Stone From The Sun’에서 밴드 이름을 따온 써드스톤의 지난 앨범은 블루스, 서던록 등의 장르적 재현이라는 말을 뺀다면 딱히 평가할 만한 점이 없었다. 곡은 진부했고 프로덕션은 조악했다. 의도는 알겠으나 결과는 함량 미달이었다. 그들이 주로 활동했던 인천의 옛 밴드들을 뛰어넘었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큰 주목을 받지 못한 2집 이후 박상도는 조덕환 밴드의 세션으로 합류, 탁월한 연주를 선보였다. 몇 번 함께 하지 않은 조덕환과의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그의 몫이었다. 조덕환 밴드의 디렉터였던 한두수가 써드스톤에 합류했고, 드럼 역시 안성용으로 교체됐다.
미국에서 반년간 유학한 박상도가 당시 느꼈던 감정과 욕망이 이번 앨범의 주요 모티프가 됐다. 큰 경험이 쌓이고 멤버가 바뀌었다. 이전과는 다른 작업이 되는 건 필연이었을 터다. 앨범 레코딩 시기 레이블 관계자들로부터 써드스톤의 새 앨범을 기대해도 좋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흘려보냈다. 어쨌든 관계자들 얘기였으니까. 하지만 ‘사이키문’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속는 셈치고 미리 들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반성이 밀려왔다.
이 앨범은 전통적인 록의 미덕을 새삼 환기하게 하는 앨범이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기타가 주인공이지만 강화된 리듬 파트는 주연의 연기를 능히 받쳐주고도 남는다. 릴 테이프에 원 테이크로 진행된 녹음은 배우들 에너지를 증폭하는 연출이자 미장센이다.
화려하되 송라이팅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박상도의 기타는 최근 기타리스트들에게선 좀체 찾아볼 수 없는 야성을 들려준다. 만약 한국어에 성(性)이 존재한다면 남성형 명사로 치환할 수 있는 어떤 단어가 이 연주에 걸맞은 표현이 됐을 것이다. 지미 헨드릭스, 지미 페이지, 에릭 클랩턴, 제프 백, 리치 블랙모어 등 그 이름을 살짝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한 페이지는 넉넉히 채울 만한 인물이 주도하던 시대의 환호성이 이 앨범에 녹아 있다.
그러나 만약 거기서 그친다면 이 앨범은 훌륭한 복고에 머물렀을 것이다. ‘사이키문’에는 그 시대 음악을 1990년대적 방법론으로 해석했던 사운드가든과 앨리스 인 체인스의 지혜가 있다. 또한 포스트록 질감으로 해석하는 21세기 동시대성이 있다. 불을 뿜는 기타, 천둥 같은 드러밍 같은 문장이 떠오르지만 어울리지는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시간차를 이용한 공간계 이펙터에 의존하지 않고도 충분히 새로운 사이키델릭을 만들 수 있음을 써드스톤은 ‘사이키문’을 통해 입증한다. 록을 듣는 기쁨이 무엇이었는지를 웅변한다. 지난 세대의 화려했던 방법론으로 써드스톤은 현 세대를 위한 에너지를 창출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