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세대를 지칭하는 말 중 가장 애처로운 것이 요즘 20대를 규정하는 ‘88만 원 세대’다. 386세대는 격정의 세월을 보냈지만 민주화투쟁이라는 명분을 안고 살았다. 이후 등장한 X세대는 부모 세대와 달리 뭐든 할 수 있는 자유를 하사받은 행운의 세대다. 경제적 풍요가 다양한 문화를 흡수할 수 있게 해줬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시대 변화를 끌어안았던 각 세대는 그들의 혈기나 낭만이 들어찰 틈을 가졌다. 그런데 88만 원 세대의 사정은 아주 다르다. 시작부터 끝까지 이들을 감싸는 것은 오로지 자본주의 경제관념뿐이다. 그들이 발붙인 사회는 고용 불안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닌다. 대학 나오면 취직된다는 말도 이젠 옛말이다. 아득바득 4년제 대학을 나온다 한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대학 탓에 특별한 경쟁력이 되진 못한다. 또 4년제 대학을 졸업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반값 등록금’은 88만 원 세대가 처한 현실을 반영한 구호다. 해외여행 자율화 조치 이후 1990년대 대학생이 낭만을 찾아 유럽여행을 갔다면, 요즘 대학생은 휴학을 위해 배낭을 싼다. 당장의 등록금, 그리고 졸업 후 닥칠 현실을 한 학기라도 회피하려는 그들만의 자구책인 셈이다.
영화 ‘티끌모아 로맨스’의 청년 백수 천지웅(송중기 분)은 88만 원 세대의 아이콘 같은 인물이다. 지방대 한문학과 출신인 그는 단돈 50원이 없어 결정적 순간에 콘돔조차 사지 못한다. 입사 원서는 내자마자 불합격 통보로 돌아온다. 보증금으로 월세를 막다가 결국 옥탑방에서도 쫓겨난다. 국밥집을 운영하는 엄마에게 용돈을 타내려 그가 에둘러 말한 88만 원 세대의 정의는 이렇다.
“요즘 취업 원서 여기저기 내려면 88만 원은 기본으로 든다고 해서 88만 원 세대라 하는 거야, 엄마.”
얼렁뚱땅 말한 듯 보이지만 이 같은 정의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살길이 막막한 지웅 앞에 번개처럼 구홍실(한예슬 분)이 나타나면서 ‘티끌모아 로맨스’의 서사 구조는 확립된다.
홍실은 말 그대로 짠순이다. 그에게 종교와 질병, 그리고 연애는 인생의 3대 금기다. 왜? 돈이 드니까. 티끌까지 모아 만든 돈을 증권에 투자해 목돈을 마련하는 게 홍실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런 홍실이 취업도 못한 데다 옥탑방에서 쫓겨날 때까지 오토바이동호회 활동과 연애에만 정신 팔린 남자에게 “내가 널 그 지독한 가난에서 구원해주겠다”며 손을 내민다. 홍실은 지웅에게 자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두 달 만에 500만 원을 벌 수 있다는 솔깃한 제안을 한다.
‘티끌모아 로맨스’는 어디까지나 로맨틱 코미디다. 그러니까 이 두 남녀는 어느 순간 자신들이 서로에게 반했음을 확인하고 사랑이라는 달콤하면서도 짜릿한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캐릭터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전략을 위해 영화 속 인물은 서로 달라야 한다. 달라도 너무 다른 남녀가 우연히 만나고, 서로 티격태격 싸우다 정이 든다는 것. 이것이 로맨틱 코미디의 기본 공식이다.
이 공식을 지웅과 홍실에 대입해보면, 지웅은 비록 돈은 없지만 궁상떨지 않고 하고 싶은 건 다 해보는 남자다. 홍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잘 모른 채 오로지 돈 모으는 것만 목표 삼아 사는 여자다. 이 영화에서 멜로가 끼어드는 지점이 바로 남녀 주인공의 차이가 유발한 틈새다.
각자의 연애 과정을 보면, 지웅은 취업했다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동호회에서 만난 예쁜 여자와 섹스를 하고 싶어 하는 과시형 인간이다. 이에 반해 홍실은 좋아하는 펀드매니저와 데이트할 때도 돈이 아까워 한남대교에서 성산대교까지 걷는 실속형 인간이다.
두 남녀는 자본주의 사회구조 속에 갇힌 20대라는 공통점을 갖지만, 서로 다른 삶의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이 정반대의 경제관념이 바로 이들 사랑을 이어주는 재료다.
‘티끌모아 로맨스’는 홍실이 지웅에게 제안한 ‘500만 원 만들기’의 구체적인 과정을 통해 웃음을 이끌어낸다.
빈 병 모아 1년치 수도요금 충당하기, 커피전문점에서 설탕 한 움큼 훔쳐오기, 공중화장실에서 휴지 가져오기, 헌혈하고 햄버거 쿠폰받기 등 수위가 낮은 1단계 전략에서부터 좀 더 적극적인 돈 모으기 방법까지 나온다. 결혼식 피로연에 밀폐형 보관용기를 가져가 음식 담아오기, 남의 집 쓰레기봉투에 우리 집 쓰레기 눌러 담기, 스타 사인을 도용해 식당에 팔기, 팔도사투리로 광고를 녹음해 트럭 장사하는 사람에게 팔기….
홍실의 경제원칙은 이런 티끌을 모아 목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티끌 모으듯 돈을 모아 목돈 만드는 세세한 방법을 보여주는 데 꽤 많은 장면을 할애한다. 두 남녀의 짠순이 행각을 보여주는 동안 영화는 로맨스라는 본궤도를 향해 달려간다.
그러나 ‘티끌모아 로맨스’는 기존 로맨틱 코미디와는 사뭇 다른 지점을 보여준다. 먼저 두 남녀의 사랑 얘기가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전개하지 않는다. 또 로맨틱 코미디에서 흔히 등장하는 ‘판타지’를 철저히 배제한다. 예를 들어, 지웅이 물에 뛰어든 홍실을 멋지게 구해냈는데 후속 장면은 홍실이 앰뷸런스 비용을 지불하는 식이다. 남녀 두 사람 가운데 누군가에게 부유층 부모가 존재하는 설정 따위는 없다. 그 대신 사랑할 여유마저 박탈당한 20대의 삶을 담담하게 그릴 뿐이다.
이 영화는 상당 부분 천커신 감독의 ‘첨밀밀’을 연상케 한다. ‘홍콩드림’을 꿈꾸며 찾아온 중국 본토 사람들, 그 척박한 현실 속에서 사랑을 이어나가는 장만옥과 여명의 애틋한 얘기 말이다. 장만옥과 여명이 길거리에서 TV를 보다 우연히 만나는 ‘첨밀밀’의 마지막 장면이 ‘띠끌모아 로맨스’에 제법 귀여운 방식으로 변용됐다. 그 장면을 눈여겨 찾아보는 것도 영화 보는 재미를 높인다.
시대 변화를 끌어안았던 각 세대는 그들의 혈기나 낭만이 들어찰 틈을 가졌다. 그런데 88만 원 세대의 사정은 아주 다르다. 시작부터 끝까지 이들을 감싸는 것은 오로지 자본주의 경제관념뿐이다. 그들이 발붙인 사회는 고용 불안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닌다. 대학 나오면 취직된다는 말도 이젠 옛말이다. 아득바득 4년제 대학을 나온다 한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대학 탓에 특별한 경쟁력이 되진 못한다. 또 4년제 대학을 졸업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반값 등록금’은 88만 원 세대가 처한 현실을 반영한 구호다. 해외여행 자율화 조치 이후 1990년대 대학생이 낭만을 찾아 유럽여행을 갔다면, 요즘 대학생은 휴학을 위해 배낭을 싼다. 당장의 등록금, 그리고 졸업 후 닥칠 현실을 한 학기라도 회피하려는 그들만의 자구책인 셈이다.
영화 ‘티끌모아 로맨스’의 청년 백수 천지웅(송중기 분)은 88만 원 세대의 아이콘 같은 인물이다. 지방대 한문학과 출신인 그는 단돈 50원이 없어 결정적 순간에 콘돔조차 사지 못한다. 입사 원서는 내자마자 불합격 통보로 돌아온다. 보증금으로 월세를 막다가 결국 옥탑방에서도 쫓겨난다. 국밥집을 운영하는 엄마에게 용돈을 타내려 그가 에둘러 말한 88만 원 세대의 정의는 이렇다.
“요즘 취업 원서 여기저기 내려면 88만 원은 기본으로 든다고 해서 88만 원 세대라 하는 거야, 엄마.”
얼렁뚱땅 말한 듯 보이지만 이 같은 정의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살길이 막막한 지웅 앞에 번개처럼 구홍실(한예슬 분)이 나타나면서 ‘티끌모아 로맨스’의 서사 구조는 확립된다.
홍실은 말 그대로 짠순이다. 그에게 종교와 질병, 그리고 연애는 인생의 3대 금기다. 왜? 돈이 드니까. 티끌까지 모아 만든 돈을 증권에 투자해 목돈을 마련하는 게 홍실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런 홍실이 취업도 못한 데다 옥탑방에서 쫓겨날 때까지 오토바이동호회 활동과 연애에만 정신 팔린 남자에게 “내가 널 그 지독한 가난에서 구원해주겠다”며 손을 내민다. 홍실은 지웅에게 자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두 달 만에 500만 원을 벌 수 있다는 솔깃한 제안을 한다.
‘티끌모아 로맨스’는 어디까지나 로맨틱 코미디다. 그러니까 이 두 남녀는 어느 순간 자신들이 서로에게 반했음을 확인하고 사랑이라는 달콤하면서도 짜릿한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캐릭터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전략을 위해 영화 속 인물은 서로 달라야 한다. 달라도 너무 다른 남녀가 우연히 만나고, 서로 티격태격 싸우다 정이 든다는 것. 이것이 로맨틱 코미디의 기본 공식이다.
이 공식을 지웅과 홍실에 대입해보면, 지웅은 비록 돈은 없지만 궁상떨지 않고 하고 싶은 건 다 해보는 남자다. 홍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잘 모른 채 오로지 돈 모으는 것만 목표 삼아 사는 여자다. 이 영화에서 멜로가 끼어드는 지점이 바로 남녀 주인공의 차이가 유발한 틈새다.
각자의 연애 과정을 보면, 지웅은 취업했다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동호회에서 만난 예쁜 여자와 섹스를 하고 싶어 하는 과시형 인간이다. 이에 반해 홍실은 좋아하는 펀드매니저와 데이트할 때도 돈이 아까워 한남대교에서 성산대교까지 걷는 실속형 인간이다.
두 남녀는 자본주의 사회구조 속에 갇힌 20대라는 공통점을 갖지만, 서로 다른 삶의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이 정반대의 경제관념이 바로 이들 사랑을 이어주는 재료다.
‘티끌모아 로맨스’는 홍실이 지웅에게 제안한 ‘500만 원 만들기’의 구체적인 과정을 통해 웃음을 이끌어낸다.
빈 병 모아 1년치 수도요금 충당하기, 커피전문점에서 설탕 한 움큼 훔쳐오기, 공중화장실에서 휴지 가져오기, 헌혈하고 햄버거 쿠폰받기 등 수위가 낮은 1단계 전략에서부터 좀 더 적극적인 돈 모으기 방법까지 나온다. 결혼식 피로연에 밀폐형 보관용기를 가져가 음식 담아오기, 남의 집 쓰레기봉투에 우리 집 쓰레기 눌러 담기, 스타 사인을 도용해 식당에 팔기, 팔도사투리로 광고를 녹음해 트럭 장사하는 사람에게 팔기….
홍실의 경제원칙은 이런 티끌을 모아 목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티끌 모으듯 돈을 모아 목돈 만드는 세세한 방법을 보여주는 데 꽤 많은 장면을 할애한다. 두 남녀의 짠순이 행각을 보여주는 동안 영화는 로맨스라는 본궤도를 향해 달려간다.
그러나 ‘티끌모아 로맨스’는 기존 로맨틱 코미디와는 사뭇 다른 지점을 보여준다. 먼저 두 남녀의 사랑 얘기가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전개하지 않는다. 또 로맨틱 코미디에서 흔히 등장하는 ‘판타지’를 철저히 배제한다. 예를 들어, 지웅이 물에 뛰어든 홍실을 멋지게 구해냈는데 후속 장면은 홍실이 앰뷸런스 비용을 지불하는 식이다. 남녀 두 사람 가운데 누군가에게 부유층 부모가 존재하는 설정 따위는 없다. 그 대신 사랑할 여유마저 박탈당한 20대의 삶을 담담하게 그릴 뿐이다.
이 영화는 상당 부분 천커신 감독의 ‘첨밀밀’을 연상케 한다. ‘홍콩드림’을 꿈꾸며 찾아온 중국 본토 사람들, 그 척박한 현실 속에서 사랑을 이어나가는 장만옥과 여명의 애틋한 얘기 말이다. 장만옥과 여명이 길거리에서 TV를 보다 우연히 만나는 ‘첨밀밀’의 마지막 장면이 ‘띠끌모아 로맨스’에 제법 귀여운 방식으로 변용됐다. 그 장면을 눈여겨 찾아보는 것도 영화 보는 재미를 높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