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필운동 백사 이항복의 집터.
오성대감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죽마고우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인데, 두 사람은 기지와 골계(滑稽)로 숱한 일화를 남겼다. 오성과 한음은 동문수학을 했고 결혼도 같은 해인 1577년(선조 10)에 했다. 오성은 권율(權慄·1537∼1599) 장군의 딸, 한음은 영의정 이산해(李山海·1539∼1609)의 딸과 결혼했다. 어릴 적 오성의 집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집으로 뻗었는데, 권율 집안의 노복이 그 감을 따가자 오성이 권율 집에 찾아가 방문 창호지에 주먹을 넣어 “이 주먹이 누구 것이냐”고 다그친 게 계기가 됐다. 한음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1517∼1578)이 한음의 총명함을 보고 조카인 이산해에게 소개했다고 한다.
한음은 오성보다 다섯 살 연하였으나 워낙 비범해 당대 천의무봉(天衣無縫)을 자랑하던 양사언(楊士彦·1517∼1584)이 14세인 한음의 시를 읽고 “군(君)이 나의 스승이다”라고 했으며, 중국까지 알려져 조사(詔使)로 온 사신이 보기를 원했으나 “예(禮)에 사사로이 보는 일이 없다”며 사절했다. 당시 대제학인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가 이 둘을 동량지재(棟梁之材)로 천거했는데, 율곡 사후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국가 최고의 자리인 영의정에 올랐다. 정녕 오성과 한음은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외우(畏友·아끼고 존경하는 벗) 정치인이었다. 오성의 기행과 익살을 살펴보자.
주춧돌에 ‘얼린’ 엉덩이를 아내 가슴에 들이밀어
오성이 벼슬하기 전 글공부에 바쁠 때의 일이다. 사랑에서 글공부를 하다 시장기가 돌면 마을에 나가 남의 집 닭을 소리 없이 움켜다 꽁무니에 차고 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자정이 넘어 내방(內房)에 들 때는 삼동겨울에도 주춧돌에 볼기를 까고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엉덩이를 잠든 부인의 앞가슴에 들이밀어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부인이 잠을 자지 않고 남편을 기다리기도 했으나, 글공부에 밤을 새우게 되니 걱정 말고 자라며 정이 폭폭 들게 은근히 사랑을 베풀었다.
오성이 하는 짓마다 그 꼴이니 부인은 성화를 내면서도 그것이 악의가 아니고 천성이 장난을 좋아하는 터라 오히려 그 맛에 정이 들었다. 그러나 부인도 언제까지나 수동적으로 피해만 입는 것이 분해 고소하게 한번 앙갚음하려고 마음을 다져먹었다.
어느 날 저녁 남편이 삼경이 넘도록 내방에 들지 않자 필시 무슨 장난이 있겠다 싶어 다리미를 가지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숯불을 이글이글 피워 다리미를 발갛게 달궈서는 남편이 늘 볼기를 까고 앉던 주춧돌에 얹어 돌을 거의 끓이다시피 해뒀다. 그런 뒤 어둠 속에 숨어 한참을 엿보자, 아니나 다를까 오성이 미닫이를 열고 나오더니 변을 보듯 천연스럽게 볼기를 까고 주춧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맴을 돌았다.
부인이 입을 가리고 가만히 방에 들어가 자는 척 누워 있으니 오성이 아무 소리 없이 엎드려서 엉덩이를 천장으로 향하고 끙끙 앓기만 했다. 부인에게 참패한 오성은 기어코 아내를 골려주리라 마음먹고 아내가 밤에 변소 가는 것을 엿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내가 오밤중에 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몰래 뒤를 밟았다. 아내가 변소에서 한참 변을 보자니까 느닷없이 험상스런 녀석이 달려들어 부인의 입을 막고 억누르며 욕을 보이려 했다.
“가인(佳人)이 치마끈 푸는 소리가 최고 아니겠소”
청천벽력을 당하듯 깜짝 놀란 부인은 있는 힘을 다해 반항했으나 강약부동(强弱不同)이라 떨쳐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가까스로 욕을 면한 부인은 그날 밤부터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지냈다. 식음을 전폐할 뿐 아니라 그늘진 안색으로 있기에 집안에서는 까닭을 모르고 걱정했다. 하룻밤은 오성이 정중하게 그 까닭을 아내에게 물었다. 여간해서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으나 오성 역시 쉽게 말을 접을 기세가 아니었다. 부인은 돌아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한숨에 잠겨 조용조용 이야기를 시작했다. 노기를 띠고 심각한 표정으로 듣던 오성은 빙그레 웃음을 머금고 그날 밤의 흉한은 자기였노라고 실토했다.
그러나 워낙 장난이 심한 남편인지라 부인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오성이 호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헝겊을 꺼내 보이면서 “이게 당신의 치마 조각 아니냐”며 다가앉으니, 그제야 부인도 숫색시처럼 부끄러운 웃음으로 마주 돌아앉았다.
경기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 82번지에 있는 한음 이덕형 선생의 묘(경기도 기념물 제89호).
다음은 오성이 출사(出仕)한 이후의 일화다. 하루는 오성이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과 교외에서 주연을 하는데, 술이 거나해지자 모두 ‘소리(聲)’에 대한 각자 풍류의 격(格)을 논하게 됐다. 먼저 송강이 “맑은 밤, 밝은 달에 다락 위로 구름 지나가는 소리가 가장 좋지”라고 하자, 서애가 “새벽 창가에 졸음이 밀릴 때 술독에 술 거르는 소리가 제일이지”라고 받았다. 그러자 오성이 웃으면서 “여러분이 소리를 칭찬하는 말이 모두 좋지만, 가장 좋기로는 동방화촉(洞房華燭) 좋은 밤에 가인(佳人)이 치마끈 푸는 소리가 아니겠소”라고 하자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어느 날에는 비변사(備邊司) 회의가 있었는데 오성이 유독 늦게 와 누군가가 “어찌 늦었습니까”라고 물으니 오성이 “마침 여럿이 싸우는 것을 보다 나도 모르게 늦었소”라고 했다. 또 묻기를 “싸우는 자는 누구던가요” 하니, 오성이 “환자(宦者·내시)는 중(僧)의 머리카락을 끌어잡고, 중은 환자의 불알을 쥐고 큰길 복판에서 싸우고 있었소”라고 해 여러 재상이 배를 잡고 웃었다. 이것은 비록 익살에서 나온 말이나 허위가 많은 당시 세태를 풍자한 것이었다.
오성과 한음이 살던 시기 세인들은 이 둘과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 등 3정승을 일컬어 ‘혼조삼이’(昏朝三李·광해군 시기의 삼이씨)라고 했다. 오리는 40년 정승생활을 했지만 비바람을 못 가릴 정도의 초가집에 살아 당시 인조가 은퇴하는 그에게 ‘흰 이불과 흰 요’를 하사해 검소한 덕을 칭송했고, 당대 한문학의 대가인 이정구(李廷龜·1564∼1635)는 “오직 그만이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했다”라며 오성의 완벽에 가까운 기품과 인격을 평가했다.
저간 대한통운 비자금사건 수사 중에 터진 한명숙 전 총리의 금품수수 의혹을 놓고 검찰 측과 소환에 불응하는 ‘한 전 총리 공동대책위원회’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이제 며칠 뒤면 다사다난했던 기축년이 저문다. 이렇게 청빈한 족적을 남긴 정승들을 돌아보면서 다가오는 경인년에는 우리 모두 앞만 보고 올곧게 걸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