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그런 애인을 뺏긴 기분입니다. 학원이라는 압도적 연적(戀敵)에게요. 과학고 준비반에 등록한 딸아이가 학원을 마치면 밤 11시입니다. 집에 와서 씻고 숙제하고 문제 풀면 일러야 새벽 2시께 잠자리에 듭니다. 엊그제 중2가 됐는데 ‘실력 수학의 정석’을 배웁니다(‘더머’인 저는 고교 졸업 때까지 ‘기본 수학의 정석’을 못 뗐습니다). 생물 올림피아드에 대비해 ‘생명과학’이라는 1400쪽짜리 대학 교재를 봅니다(따라오든 말든 수준 높은 교재를 세 번쯤 반복해 가르치면 대충 풍월은 읊는다는 게 이른바 ‘선행학습’의 원리더군요). 수시로 반편성 시험을 치러 성적순으로 뉴턴-퀴리-다윈-허블반에 배치합니다(뉴턴이 허블보다 4배쯤 위대한 과학자인 모양입니다). 저녁시간으로 10분을 주는데, 담뱃갑보다 조금 큰 도시락을 절반도 못 먹고 옵니다. 학부모 간담회 때 엄마들이 “애들 밥 먹는 시간은 넉넉히 주면 좋겠다” “주말 수업을 좀 줄일 수 없겠냐”고 했더니 지엄한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우리 학원 아이들은 대개 중1 때부터 특목고 준비를 하지만, 강남 아이들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시작합니다. 걔들보다 진도가 1년 반 이상 느리기 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찍. 저와 집사람은 ‘강북’의 ‘서민동네’에 사는 ‘맞벌이 부부’에다 ‘입시정보 까막눈’입니다. 4대 원죄를 다 짊어졌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미리 챙겨주지 못해 뒤늦게 고생하는 아이한테 미안할 따름이지요. 측은한 마음에 옆구리 쿡 찌르며 “할 만하냐?”고 물으면 아이는 눈도 안 마주친 채 “이게 사는 거야?” 하고 맙니다. 찍. “까짓 과고 못 가면 어때. 그저 실력 쌓는 기회라고 생각해. 하는 데까지 해보다 안 되면 마는 거지 뭐”라며 나름 관대하고 합리적인 부모인 양 슬쩍 발을 뺍니다.
소설가 이기호 씨는 “선거에서 현 대통령을 찍지 않았고 지금도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지만, 이 땅의 교육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준다면 어떤 욕을 먹더라도 그를 지지할 마음”이라고 썼습니다. 대한민국 어느 부모라고 생각이 다르겠습니까. 딸아이가 앞으로 5년이나 더 ‘사는 것 같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 정말 지긋지긋합니다.
그렇다고 학력평가 거부, 특목고 폐지, 사교육 금지 같은 극단적 처방이 해결책은 아닌 듯합니다. 재능 있는 아이들의 영재성은 일찌감치 발견해 최적의 여건에서 꽃피울 수 있게 해야 하고, 자신을 던지다시피 그런 자녀를 뒷바라지하는 부모의 열성도 제대로 보상받아야 합니다. 주간동아 편집실이 갑론을박 끝에 초등학생 입시전략을 이번 호 대특집 커버스토리 주제로 정한 것도 비록 씁쓸하되 엄연히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