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탓’이라고 했지만 말 속엔 여전히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한식(韓食)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원망하는 대목에선 때론 가슴을 치고 주먹을 쥐었다. 도자기업체 광주요의 조태권(61·사진) 회장. 도자기 회사가 한식 사업에 뛰어들어 화제가 됐지만, 조 회장은 이제 ‘한식 세계화’의 꿈을 뒤로 미뤘다. 한식 세계화의 ‘실험실’이었던 한식 전문 레스토랑 ‘가온(GAON)’과 대중적인 한정식당 ‘낙낙(樂樂)’도 최근 문을 닫았다. 1인당 10만원이 넘는 가격 때문에 ‘비싸다’는 말이 적잖았고 적자경영도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꿋꿋이 밀고 나가겠다던 그의 약속은 더 이상 지켜지지 못하게 됐다. 일부 언론에는 ‘일시 휴업’이라고 소개됐지만 조 회장은 “한국과 중국 등의 8개 한식당을 모두 접을 계획”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8개 한식당 모두 접을 것”
2007년 10월 미국 캘리포니아의 포도밭 동네인 나파밸리에서 최고의 한식을 선보이는 등 20여 년간 500억원을 한식문화 연구에 쏟아부었다는 조 회장. ‘한식 전도사’를 자처하던 그가 ‘실험’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뭘까.
-애지중지하던 ‘한식 실험실’이 문을 닫았다. 가장 큰 이유는.
“순풍을 타고 5km만 가면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0km 갈 연료를 갖추고 비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20km를 가도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고, 순풍이 돌풍으로 바뀌었다. 엔진에도 불이 붙어 결국 비상 착륙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판단 미스’였다.”
-무엇을 잘못 판단했다는 말인가.
“우리 문화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탓이 컸다. 서양이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온 것을 우리는 50년 만에 이루다 보니 우리 문화를 제대로 보는 시야가 없어진 것이다. 갑자기 부자가 된 탓에 생활 속의 가치를 등한시했다. 역사적으로 명품이란 한 나라의 국민이 인정하는 제품이 세계화한 것이다. 서양에서 포크가 대중의 식탁에 등장한 것은 200여 년 전이다. 왕실과 귀족 계층에서 사용한 포크가 동경의 대상이 되면서 ‘포크 문화’가 확산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과정이 없었다. 음식문화가 가격 경쟁의 대상이 되다 보니 가치를 경쟁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고급 한식당 운영을 시작한 것이) 너무 빨랐다. 게다가 너무 크게 시작했다. 시행착오를 분석하고 식문화 전체를 다시 점검하는 기회로 삼을 수밖에….”
-구체적으로 실패의 원인을 설명해달라.
“정성을 쏟은 만큼 그 값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외에는 1인당 500달러가 넘는 식당이 많으니 한식도 가능하리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한식 분야에 불신이 많더라. 여전히 한식당은 요정, ‘니나노 문화’라는 인식이 강하고 돈 있는 사람들은 ‘밥장사’를 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비빔밥=5000원짜리’라는 인식만 있다. 궁중 문화, 지식층 문화가 있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고급 식문화는 사라졌다. 대중화되지 못한 것이다.”
-소비자들이 한식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인가.
“모텔과 5성급 호텔에는 각각의 등급에 맞는 손님, 분위기, 음식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한식을 모텔 음식 정도로 생각한다. 5성급 한식이 있는데도 말이다. 사실 ‘슈퍼스타’(그는 제대로 된, 그리고 가치 있는 한식당을 이렇게 말했다) 하나만 나와도 됐다. 슈퍼스타는 ‘가보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게 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곳’을 말한다. 슈퍼스타를 키우려 했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돈을 벌어야 그 길로 뛰어들지.”
-그래도 뉴스 메이커로서 한식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았나.
“문화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 하면 전염된다. 대통령이 마신 술은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와 국회의원들이 따라 마시지 않는가. 식문화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는 유명인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장사하는 사람으로 비춰져 색안경을 끼고 나를 바라보는 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목적지’는 어디였나.
“세계인 누가 봐도 ‘이곳이 코리안 레스토랑’이라고 인정할 만한 한식당을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의 양념과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아름다운 도자기에 담아낸 한식을 세계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전통 한옥에서 두부와 캐비아(철갑상어 알을 소금에 절인 식품)의 만남, 왜 안 되겠나. 세계 각국의 한국 음식점이 잘되면 한국산 농수산물, 양념, 가공식품, 지역 특산품 등의 수출 활로도 뚫린다. 후손들이 먹고살 길을 만들어줄 수 있다. 세계 식품시장은 이미 5000조원을 넘어섰다. 이런 산업에 정부와 기업이 나서지 않으니…. 세계적인 도시마다 한국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슈퍼스타’가 하나씩은 있어야 한다.”
-정부에서도 한식 세계화를 목표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데.
“(손사래를 치며) 그동안 정부와 대기업에 한식 세계화에 대해 왜 말하지 않았겠나. 할 만큼 다했다. 인식이 부족하다. 한식 세계화는 농림수산식품부와 문화관광부의 적극적인 후원이 필요하다. 방법은 간단하다. 1000억원을 5년 거치 10년 분할상환 해주거나 1000평(3305.8㎡)을 30년 임대해주면 된다. 자신 있다. (정부 관계자들에게) 말도 많이 했다. 대기업은 비싼 로열티 주고 외국 음식을 들여오는 대신 한식당에서 접대하면 된다.”
-한식 사업을 접은 후 변화가 있었나.
“(잠시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안 하던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오더라.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하는 척하면서 결국 ‘그럴 줄 알았다’며 비아냥거렸다. 나는 이제 다 털어버렸다. 변화라면 변화다.(웃음)”
조 회장은 “한식을 준비하면서 4년 전 내놓은 증류주 ‘화요(火堯)’의 고급화에 매진하겠다”며 “다시 이륙할 때를 기다리겠다”는 말로 인터뷰를 끝냈다.
“8개 한식당 모두 접을 것”
2007년 10월 미국 캘리포니아의 포도밭 동네인 나파밸리에서 최고의 한식을 선보이는 등 20여 년간 500억원을 한식문화 연구에 쏟아부었다는 조 회장. ‘한식 전도사’를 자처하던 그가 ‘실험’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뭘까.
-애지중지하던 ‘한식 실험실’이 문을 닫았다. 가장 큰 이유는.
“순풍을 타고 5km만 가면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0km 갈 연료를 갖추고 비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20km를 가도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고, 순풍이 돌풍으로 바뀌었다. 엔진에도 불이 붙어 결국 비상 착륙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판단 미스’였다.”
-무엇을 잘못 판단했다는 말인가.
“우리 문화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탓이 컸다. 서양이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온 것을 우리는 50년 만에 이루다 보니 우리 문화를 제대로 보는 시야가 없어진 것이다. 갑자기 부자가 된 탓에 생활 속의 가치를 등한시했다. 역사적으로 명품이란 한 나라의 국민이 인정하는 제품이 세계화한 것이다. 서양에서 포크가 대중의 식탁에 등장한 것은 200여 년 전이다. 왕실과 귀족 계층에서 사용한 포크가 동경의 대상이 되면서 ‘포크 문화’가 확산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과정이 없었다. 음식문화가 가격 경쟁의 대상이 되다 보니 가치를 경쟁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고급 한식당 운영을 시작한 것이) 너무 빨랐다. 게다가 너무 크게 시작했다. 시행착오를 분석하고 식문화 전체를 다시 점검하는 기회로 삼을 수밖에….”
-구체적으로 실패의 원인을 설명해달라.
“정성을 쏟은 만큼 그 값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외에는 1인당 500달러가 넘는 식당이 많으니 한식도 가능하리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한식 분야에 불신이 많더라. 여전히 한식당은 요정, ‘니나노 문화’라는 인식이 강하고 돈 있는 사람들은 ‘밥장사’를 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비빔밥=5000원짜리’라는 인식만 있다. 궁중 문화, 지식층 문화가 있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고급 식문화는 사라졌다. 대중화되지 못한 것이다.”
조태권 회장이 한식 세계화를 위해 적극 추천했던 한식. 왼쪽부터 어회샐러드, 랍스터떡볶음, 등심구이, 홍계탕죽, 후식.
“모텔과 5성급 호텔에는 각각의 등급에 맞는 손님, 분위기, 음식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한식을 모텔 음식 정도로 생각한다. 5성급 한식이 있는데도 말이다. 사실 ‘슈퍼스타’(그는 제대로 된, 그리고 가치 있는 한식당을 이렇게 말했다) 하나만 나와도 됐다. 슈퍼스타는 ‘가보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게 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곳’을 말한다. 슈퍼스타를 키우려 했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돈을 벌어야 그 길로 뛰어들지.”
-그래도 뉴스 메이커로서 한식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았나.
“문화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 하면 전염된다. 대통령이 마신 술은 대기업 최고경영자(CEO)와 국회의원들이 따라 마시지 않는가. 식문화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는 유명인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장사하는 사람으로 비춰져 색안경을 끼고 나를 바라보는 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목적지’는 어디였나.
“세계인 누가 봐도 ‘이곳이 코리안 레스토랑’이라고 인정할 만한 한식당을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의 양념과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아름다운 도자기에 담아낸 한식을 세계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전통 한옥에서 두부와 캐비아(철갑상어 알을 소금에 절인 식품)의 만남, 왜 안 되겠나. 세계 각국의 한국 음식점이 잘되면 한국산 농수산물, 양념, 가공식품, 지역 특산품 등의 수출 활로도 뚫린다. 후손들이 먹고살 길을 만들어줄 수 있다. 세계 식품시장은 이미 5000조원을 넘어섰다. 이런 산업에 정부와 기업이 나서지 않으니…. 세계적인 도시마다 한국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슈퍼스타’가 하나씩은 있어야 한다.”
-정부에서도 한식 세계화를 목표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데.
“(손사래를 치며) 그동안 정부와 대기업에 한식 세계화에 대해 왜 말하지 않았겠나. 할 만큼 다했다. 인식이 부족하다. 한식 세계화는 농림수산식품부와 문화관광부의 적극적인 후원이 필요하다. 방법은 간단하다. 1000억원을 5년 거치 10년 분할상환 해주거나 1000평(3305.8㎡)을 30년 임대해주면 된다. 자신 있다. (정부 관계자들에게) 말도 많이 했다. 대기업은 비싼 로열티 주고 외국 음식을 들여오는 대신 한식당에서 접대하면 된다.”
-한식 사업을 접은 후 변화가 있었나.
“(잠시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안 하던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오더라.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하는 척하면서 결국 ‘그럴 줄 알았다’며 비아냥거렸다. 나는 이제 다 털어버렸다. 변화라면 변화다.(웃음)”
조 회장은 “한식을 준비하면서 4년 전 내놓은 증류주 ‘화요(火堯)’의 고급화에 매진하겠다”며 “다시 이륙할 때를 기다리겠다”는 말로 인터뷰를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