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가 넘은 힌두쿠시 산맥. 나폴레옹이 통과한 알프스 지점은 해발 2500m였지만 고선지가 지나갔던 탄구령은 무려 4600m가 넘는 지역이었다.
고선지는 747년 기병 1만명을 이끌고 4개월간의 대장정 끝에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파미르 고원을 횡단했다. 그리고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파키스탄 북부로 들어섰다. 힌두쿠시 산맥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K2봉을 비롯해 8000m를 넘는 산 다섯 봉우리가 버티고 있는 곳이다. 게다가 고선지는 이 산맥을 왕복했다. 한니발과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를 공격할 때만 알프스 산맥을 지나갔을 뿐, 회군 때는 지중해 연안으로 돌아갔다.
중앙아시아 역사학의 권위자인 미국 인디애나대학의 크리스토퍼 교수 역시 동서교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고선지를 꼽는다. 제지술이 서방으로 전래된 계기가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아랍 대 중국’ 전쟁인 탈라스(카자흐스탄) 전투(751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고선지는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고선지가 동원한 북방 종족이 아랍과 내통해 그를 배반했기 때문이다. 이후 중앙아시아의 패권은 당나라에서 이슬람 문명인 사라센제국의 손에 떨어졌고, 중앙아시아는 무슬림화했다.
탈라스 전투 때 서방에 종이 만드는 기술 전파
중국 후한(後漢) 4대 황제 원년(105년), 환관 채륜이 종이를 발명했다. 같은 시대 로마에서는 파피루스나 목판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문자를 기록하는 수단에서 동양보다 크게 뒤졌던 것이다. 제지술이 전파되기 전까지 유럽은 문자 기록의 수단으로 양피지를 사용했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수백 마리의 양이 도살됐다. 하지만 탈라스 전투 이후 서방은 비로소 종이문명을 접하게 된다.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군에 포로가 된 2만명의 당나라군 가운데는 제지기술자도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제지술은 이들에 의해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 전해진 뒤 점차 바그다드(이라크), 다마스쿠스(시리아)를 비롯한 이슬람세계 각지에 퍼졌다. 스페인에 이슬람 세력권인 그라나다 왕국(1238~1492)이 세워지자 그곳에도 자연스럽게 제지술이 전파됐다. 그 후 제지술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시칠리아(이탈리아)로, 또 콘스탄티노플(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을 통해 유럽으로 들어왔으며, 다시 영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 필라델피아에까지 이르렀다.
몇 년 전 미국의 ‘라이프’지는 지난 밀레니엄 동안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을 꼽았다. 탈라스 전투 때 전파된 중국의 제지술은 아랍인을 통해 유럽 각지에 전달돼 마침내 밀레니엄 최고의 사건을 터뜨린 것이다. 1456년 최초의 인쇄물인 성서가 출간됐다. 이는 성서의 민간 보급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양문명의 핵심인 기독교의 빠른 전파에 일조했다. 그 영향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고선지의 탈라스 전투는 인류문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역사적 사건이었던 셈이다.
나침반도 탈라스 전투 이후 전파된 문물 중 하나다. 이슬람인들은 종교의례(성지 메카를 향해 절할 때 방향을 찾는 데 활용)와 항해에 나침반을 사용했다. 유럽으로 전해진 나침반 덕분에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마젤란은 희망봉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지배선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고선지 평전’(청아출판사)에서 제지술 전파의 촉매 구실을 한 고선지를 ‘유럽 문명의 아버지’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르네 크루세 등 중앙아시아 관련 분야의 권위 있는 서양학자들도 고선지를 동서교류사의 획기적인 인물로 보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고구려인인 고선지는 어떻게 오늘날까지 중국인으로 세계에 이름을 떨친 것일까. 북송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고구려가 망한 후 당나라는 20만명의 포로를 강제 이송하고 평양에는 노약자만 남겨두었다”고 전한다. 고구려인들은 나라가 망했어도 끝까지 당나라에 대항했고, 이를 막기 위해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던 것이다. ‘고구려 유민의 후예’ 고선지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곳은 중국 서부 간쑤(甘肅)성이다. 사막 사이 길게 오아시스가 있는 이 지역은 중국에서 서역으로 가기 위한 관문이다.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 장군은 이곳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고선지도 스무 살에 중국 신장(新疆)에서 군인이 됐다. 그리고 실크로드를 장악한 안서(安西)도호부 절도사에까지 이르게 됐다. 탈라스 전투 패배 후 뚜렷한 관직이 없던 고선지는 안록산의 반란(755년)을 진압하며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그러나 고구려인 고선지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당나라 현종과 환관들은 고선지를 없애기로 한다. 결국 고선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국땅에서 쓸쓸하게 죽었다.
누명을 썼을 당시 고선지는 본인이 원했다면 부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패망한 고구려인으로 더는 어떤 모욕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나라에서 고선지는 멸망한 조국에서 강제로 끌려간 포로의 후손이었을 뿐이었다. ‘구당서’ ‘자치통감’ 등 중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고선지의 선임 안서절도사가 고선지의 전공을 시기한 나머지 ‘개똥 같은 고구려놈’이라 욕했고 고선지가 안서절도사가 된 뒤에도 당나라 벼슬아치들이 그를 헐뜯기 일쑤였다고 한다. 당시의 당나라인들은 고선지를 중국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당나라에 의해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사실이고, 고선지 장군으로 인해 세계 문명교류사가 한 단계 진전한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고선지의 서역 원정은 중세 동서교류사에 일대 전기
문명교류사 연구의 권위자 정수일 교수는 그래서 ‘한국 속의 세계’(창작과비평)에서 고선지를 ‘겨레사를 빛낸 유민의 원형’이자 ‘세계 문명교류사에 기여한 사건 창조형 인물’로 정의한다. 우선 고선지의 서역 원정은 중세 동서관계사에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그의 4차에 걸친 서역 원정은 승승장구하는 이슬람의 중앙아시아와 중국 동진에 제동을 걸었는가 하면, 그의 최후 일전인 탈라스 전투의 패배는 이슬람이 중앙아시아에 정착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 탈라스 전투 결과, 파미르 고원을 경계로 양대 강국인 이슬람제국과 당 제국이 동서에 병립하는 새 국제질서가 확립됐다. 일단 승패가 갈라진 뒤에는 동서교류가 활발히 전개됐다. 이슬람은 당에 사절을 파견하고, 슬슬(瑟瑟·보석)이나 한혈마(汗血馬) 같은 서역문물이 중국에 들어왔으며 이 문물들은 신라에까지 알려졌다. 이슬람 문명이나 유럽 문명의 발달은 제지술의 도입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 그것은 고선지의 서역 원정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에 고선지가 갖는 문명교류사적 의미는 실로 크다는 것이 문명교류사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그렇다면 서양에 제지술을 전파해 인류문명을 크게 발전시킨 고선지의 업적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과연 중국사인가, 한국사인가, 제3의 동아시아사인가. 여기에서도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 또는 제3의 역사론 간의 논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잠재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