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먹는지는 철저하게 문화의 문제다. 인도인은 쇠고기를 음식의 범주에 넣지 않지만, 유럽인에겐 쇠고기가 주식이다. 재료뿐 아니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조리과정도 철저히 문화의 문제다. 개고기 문화가 존재하는 동양 3국에서도 비행기, 군함, 책상만 빼고 무엇이든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중국 음식 문화의 도구가 불이라면 일본은 칼, 한국은 발효 문화의 특성을 지닌다.
베트남인은 개의 창자로 순대까지 만들고, 개고기로 최소한 30여 가지 요리를 만든다. 아마존 여전사들에겐 뱀고기가 주식이다. 성경에는 성경의 식탁이 있고 코란에는 코란의 식탁, 탈무드엔 탈무드의 식탁이 따로 있다. 출애굽기에 보이는 바, 모세가 황야의 40년을 떠돌며 ‘너희가 먹을 수 있는 것은 딱정벌레와 메뚜기 떼와 개미 떼와…’라는 것이 곧 구약의 식탁이다.‘꿀과 젖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가자!’는 것이 곧 모세의 목마름이요, 구호요, 슬로건이었다. 아프리카 숲 속 부족간의 먹이탈취 전쟁이 ‘흰개미 떼’로 모아지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생식과 화식, 숙성, 이것이 그 유명한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음식의 삼각도다. 생식이든 화식이든 발효든 이를 탓할 근거는 없다. 프랑스인이 거위 간을 빼먹든, 중국인이 원숭이 골을 끌과 정으로 쪼아 빼먹든, 한국인이 개고기 간을 빼먹든 이를 탓할 수 있는 주체는 지구상에 아무도 없다. 평생을 그렇게 몸으로 업을 지으며 살아야 하는 것이 지구인의 숙명이다.
글로벌리즘과 생태환경의 문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개고기 시비론을 들고 나오는 프랑스인이라면 적어도 티베트인의 몸 정신(food-chain)을 먼저 배울 일이다. 먹이를 탈취한 늙은 개처럼 살이 붙은 브리지트 바르도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바로 그 몸을 흰대머리 독수리들에게 내주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지구적 공동체의 정신으로 티베트에서 치르는 조장(鳥葬) 정신이다.
겨울에도 개고기로 문전성시인 순천시 가곡동의 토지식당(왕경순ㆍ061-752-2717)의 식탁에서 요즘 뜨겁게 일고 있는 개고기 논쟁의 결론이다. 월드컵을 앞두고 벌어진 뉴스가 개고기인지라 개고기 식탁에서 논쟁이 벌어진 것은 당연한 이치다. 강화도를 침략해 340책 외규장각 도서를 탈취해간 프랑스 군대는 강화부와 외규장각 건물까지 불태웠다. 진짜 먹이는 돌려주지 않고 음식 독재론을 들고 나와 타박이라니!
“우리가 개고기라고 다 먹는 건 아니잖습니까? 풍산개, 갑산개, 진돗개 등 족보 반듯한 것은 얼마나 보호를 잘합니까? 개 사랑은 브리지트 바르도보다 더할걸요!”
맞는 말이다. 어느 프랑스 신부의 조크가 생각난다. 광주에 오래 살다 보니 으레 고목 느티나무 그늘 속엔 보신탕집이 있더라는 것이다. 왜 보신탕집은 큰 나무 그늘 속으로만 들어가느냐고 대단한 사건이나 발견한 듯 떠들어댄다. 나는 찬바람 속에서 먹어도 시원찮은데 펄펄 끓는 개장국을 복날 땡볕 속에서 먹느냐고 맞받았다.
복(伏)은 오행설에서 가을의 서늘한 금기(金氣)가 더운 화기(火氣)를 두려워하여 복장(伏藏)한다는 뜻에서 생긴 말이다. 여름철 보양식으로 더위를 막고 원기를 회복하며, 병후 회복기 환자에게 개고기 이상이 없다는 것을 동양고전은 밝히고 있다. 유득공의 ‘경도잡기’엔 개장국은 복달임으로 선호되는 민중의 음식이라 했고, 한고조(유방)나 정조대왕도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도 거위 간이나 원숭이 골은 혐오식품이 아니고 개고기만 지탄받는다는 건 언어도단이다. 더욱이 이 때문에 전통음식이 검약과 절제의 선풍은커녕 정체성 위기까지 느낀다면 말도 안 된다. 겨울에도 문전성시인데 왜 개고기 깡통(통조림)은 없는가? 오히려 그것이 의문스럽다.
베트남인은 개의 창자로 순대까지 만들고, 개고기로 최소한 30여 가지 요리를 만든다. 아마존 여전사들에겐 뱀고기가 주식이다. 성경에는 성경의 식탁이 있고 코란에는 코란의 식탁, 탈무드엔 탈무드의 식탁이 따로 있다. 출애굽기에 보이는 바, 모세가 황야의 40년을 떠돌며 ‘너희가 먹을 수 있는 것은 딱정벌레와 메뚜기 떼와 개미 떼와…’라는 것이 곧 구약의 식탁이다.‘꿀과 젖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가자!’는 것이 곧 모세의 목마름이요, 구호요, 슬로건이었다. 아프리카 숲 속 부족간의 먹이탈취 전쟁이 ‘흰개미 떼’로 모아지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생식과 화식, 숙성, 이것이 그 유명한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음식의 삼각도다. 생식이든 화식이든 발효든 이를 탓할 근거는 없다. 프랑스인이 거위 간을 빼먹든, 중국인이 원숭이 골을 끌과 정으로 쪼아 빼먹든, 한국인이 개고기 간을 빼먹든 이를 탓할 수 있는 주체는 지구상에 아무도 없다. 평생을 그렇게 몸으로 업을 지으며 살아야 하는 것이 지구인의 숙명이다.
글로벌리즘과 생태환경의 문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개고기 시비론을 들고 나오는 프랑스인이라면 적어도 티베트인의 몸 정신(food-chain)을 먼저 배울 일이다. 먹이를 탈취한 늙은 개처럼 살이 붙은 브리지트 바르도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바로 그 몸을 흰대머리 독수리들에게 내주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지구적 공동체의 정신으로 티베트에서 치르는 조장(鳥葬) 정신이다.
겨울에도 개고기로 문전성시인 순천시 가곡동의 토지식당(왕경순ㆍ061-752-2717)의 식탁에서 요즘 뜨겁게 일고 있는 개고기 논쟁의 결론이다. 월드컵을 앞두고 벌어진 뉴스가 개고기인지라 개고기 식탁에서 논쟁이 벌어진 것은 당연한 이치다. 강화도를 침략해 340책 외규장각 도서를 탈취해간 프랑스 군대는 강화부와 외규장각 건물까지 불태웠다. 진짜 먹이는 돌려주지 않고 음식 독재론을 들고 나와 타박이라니!
“우리가 개고기라고 다 먹는 건 아니잖습니까? 풍산개, 갑산개, 진돗개 등 족보 반듯한 것은 얼마나 보호를 잘합니까? 개 사랑은 브리지트 바르도보다 더할걸요!”
맞는 말이다. 어느 프랑스 신부의 조크가 생각난다. 광주에 오래 살다 보니 으레 고목 느티나무 그늘 속엔 보신탕집이 있더라는 것이다. 왜 보신탕집은 큰 나무 그늘 속으로만 들어가느냐고 대단한 사건이나 발견한 듯 떠들어댄다. 나는 찬바람 속에서 먹어도 시원찮은데 펄펄 끓는 개장국을 복날 땡볕 속에서 먹느냐고 맞받았다.
복(伏)은 오행설에서 가을의 서늘한 금기(金氣)가 더운 화기(火氣)를 두려워하여 복장(伏藏)한다는 뜻에서 생긴 말이다. 여름철 보양식으로 더위를 막고 원기를 회복하며, 병후 회복기 환자에게 개고기 이상이 없다는 것을 동양고전은 밝히고 있다. 유득공의 ‘경도잡기’엔 개장국은 복달임으로 선호되는 민중의 음식이라 했고, 한고조(유방)나 정조대왕도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도 거위 간이나 원숭이 골은 혐오식품이 아니고 개고기만 지탄받는다는 건 언어도단이다. 더욱이 이 때문에 전통음식이 검약과 절제의 선풍은커녕 정체성 위기까지 느낀다면 말도 안 된다. 겨울에도 문전성시인데 왜 개고기 깡통(통조림)은 없는가? 오히려 그것이 의문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