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노벨물리학상은 초전도 회로를 통해 미시세계의 양자 현상이 거시적 전기 시스템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 과학자들에게 수여됐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 제공
올해 노벨물리학상은 존 클라크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UC 버클리) 명예교수, 미셸 드보레 미국 예일대 명예교수, 존 마티니스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타바버라캠퍼스(UC 샌타바버라) 명예교수가 수상했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이들이 전기회로에서 ‘거시적 양자터널링(macroscopic quantum tunneling)’과 ‘에너지 양자화(energy quantization)’를 실험적으로 입증해 양자역학의 법칙이 공학적 규모에서도 성립한다는 점을 보여준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밝혔다.
초전도 회로로 입증한 양자터널링
양자역학의 법칙은 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만 머물까. 이들 연구의 출발점이 된 질문이다. 양자역학은 전자나 원자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입자들이 따르는 법칙이다. 이 세계에서는 우리가 아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입자가 한 곳에만 있지 않고 동시에 여러 위치에 존재하거나, 충분한 에너지가 없어도 벽을 통과해 반대편에 나타나는 일이 벌어진다.1980년대 중반 물리학자 3명은 이 물음을 직접 실험으로 확인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초전도체–절연체–초전도체로 구성된 ‘조셉슨 접합(Josephson junction)’ 회로를 제작했다. 일반 회로에서는 전류가 절연막이라는 장벽에 막혀 더는 흐르지 못하지만, 이 회로에서는 무전압 상태인 초전도 시스템이 양자터널링을 통해 전압이 생기는 상태로 전이하는 현상이 관측됐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문을 통과해 반대편으로 순간 이동하듯이 회로가 스스로 ‘꺼짐(off)’ 상태에서 ‘켜짐(on)’ 상태로 전환된 것이다.
이 현상은 ‘거시적 양자터널링’으로 불린다. 수많은 전자가 집단으로 움직이는 회로 전체가 양자역학의 법칙을 따른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어진 실험에서 연구진은 회로에 여러 주파수의 마이크로파를 쏴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했다. 그 결과 회로는 모든 신호에 반응하지 않고 몇몇 특정 주파수의 마이크로파만 받아들였다. 이는 회로의 에너지가 연속적으로 바뀌지 않고 일정한 단계로만 변한다는 뜻이다. 원자 속 전자가 특정 껍질 사이를 오가듯이 초전도 회로에서도 에너지가 정해진 간격으로만 전이됐다고 볼 수 있다.
연구진이 개발한 조셉슨 접합 회로는 거시적 크기의 ‘인공 원자(artificial atom)’로 불린다. 초전도 상태의 전자쌍이 하나의 양자입자처럼 움직이며 실제 원자와 유사한 에너지 준위를 갖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이 인공 원자를 통해 양자 상태를 직접 제어하고 관측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하면서 자연의 원자를 모방하는 단계를 넘어 ‘양자현상을 손으로 다루는 시대’를 여는 출발점을 마련했다. 작은 회로에서 출발한 양자 제어 원리가 초전도 큐비트(qubit)와 양자센서 등 차세대 양자정보기술의 토대로 이어져 산업 기술로 확장될 수 있음을 처음 보여준 셈이다.
기초과학이 세상 바꾼다
올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3명은 모두 물리학 연구의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다. 클라크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출신으로 UC 버클리 명예교수이며, 초전도 양자회로 연구의 개척자로 꼽힌다. 프랑스 파리 출신인 드보레는 예일대 명예교수이면서 구글 퀀텀 AI 부문과 예일대 양자연구센터 운영도 병행하고 있다. 마티니스는 UC 샌타바버라 교수 출신으로 2014년 구글에 합류해 양자컴퓨팅 프로젝트를 이끌다가 2020년께 퇴사하고 스타트업 콜랩(Qolab)을 공동 창업해 최고기술책임자(CTO)로 활동 중이다.이들이 40년 전 실험실의 초전도 회로에서 포착한 양자 현상은 이제 산업 언어로 확장되고 있다. 초전도 회로 기반의 양자 제어 원리는 오늘날 초전도 큐비트 기술의 기초가 됐으며, 마이크로파 증폭기·양자센서·정밀 계측기 등 다양한 ‘양자정보기계’의 핵심 요소로 발전했다. 거시적 양자터널링과 에너지 양자화 개념은 이후 초전도 큐비트 설계로 이어져 구글, IBM,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기업이 주도하는 양자컴퓨터 경쟁의 이론적·실험적 토대를 마련했다.
양자컴퓨터는 ‘양자중첩’ 원리를 사용해 신약 개발 분야에서 수백만 개 분자 반응을 동시에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초전도체나 배터리 소재의 특성을 원자 규모로 예측할 뿐 아니라, 금융시장의 복잡한 확률 계산이나 기후 예측까지 단번에 처리할 수 있다.
나아가 초전도 회로 기술은 센서 영역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초전도 양자회로 기반 센서는 뇌파나 미세 자기장, 암흑물질 신호 등 극히 약한 물리적 신호를 감지할 수 있어 지구물리 탐사는 물론 의료 영상, 보안 감시 분야에서 새로운 계측 도구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양자 상태는 여전히 열과 진동, 소음에 취약하다. 극저온 유지와 정밀 제어 없이는 안정된 양자 상태를 지속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연구 방향은 이미 산업으로 향하고 있다. 실험실의 작은 회로에서 출발한 과학이 이제는 신약 개발과 에너지 설계, 금융 분석을 움직인다. 느리게 쌓인 기초과학이 결국 세상을 가장 빠르게 움직이게 하는 엔진이 된다는 것이 이번 노벨물리학상이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다. 맬컴 콘로리 영국 임페리얼칼리지 런던 조교수는 대학 공식 논평을 통해 “양자물리가 실험실 이론에서 벗어나 기술과 산업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