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웬치는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인 범죄조직이 운영하는 범죄 단지를 뜻한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인근에 있는 ‘태자 단지’가 대표적인 웬치다. 동아DB
범죄자금 캄보디아 GDP 25% 규모
웬치는 거대한 감옥과도 같다. 범죄조직은 잡아온 사람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웬치에 높은 콘크리트 벽과 철조망, 전기 방벽을 세운다. 검문소와 초소를 두고 무장 경비 등이 24시간 지키기도 한다. 웬치에서 일꾼으로 일하면서 실적을 못 올리거나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히면 무자비한 고문과 폭행이 뒤따른다. 웬치에 있는 사람들은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며,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셈이다.웬치 규모는 천차만별인데, 비교적 규모가 큰 웬치에는 4000∼5000명까지 거주한다. 캄보디아에는 400여 개 웬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직 총책은 대부분 중국인이고, 그 아래 조직원을 관리하는 국가별 팀장이 존재한다. 한국인 대상 범죄조직이면 한국인 팀장 밑에 적게는 10명, 많게는 50~60명의 한국인이 있다.
최근 한국인 대학생 사망사건이 발생한 캄보디아가 중국인 범죄조직의 ‘해방구’로 변했다는 국제사회의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제인권단체 앰네스티인터내셔널(Amnesty International·이하 앰네스티)은 6월 발간한 ‘나는 누군가의 소유물이었다’ 보고서를 통해 “캄보디아 16개 도시에서 53개 범죄단지가 운영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앰네스티는 18개월간 피해자 58명, 생존자 365명의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범죄단지 위치를 특정했다.
캄보디아 범죄단지는 프놈펜과 남서부 항구도시 시아누크빌뿐 아니라 보코산, 바벳, 포이펫 등 태국·베트남 국경 근처 중소 도시들에도 있다. 이들 범죄단지가 만들어진 것은 2020년대부터다. 2010년대 중국 정부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따라 캄보디아에 막대한 자본이 투입됐고, 그중 대부분이 카지노·호텔·리조트 건설에 쓰였다. 이후 이권을 노린 중국계 범죄조직이 캄보디아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국경이 봉쇄되자 범죄조직들은 온라인 사기로 사업 방향을 전환했다. 캄보디아 경찰 등이 범죄조직과 이들이 만든 범죄단지를 제대로 단속하거나 처벌하지 않은 채 방관한 것도 상황을 악화했다. 앰네스티가 확인한 범죄단지 53개 중 캄보디아 경찰 단속으로 문을 닫은 곳은 2개에 불과하다.
캄보디아에서 범죄조직이 기승을 부리는 원인은 38년간 독재체제를 유지해온 훈센 정권과의 유착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훈센 전 캄보디아 총리는 1997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뒤 장기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2023년 장남 훈마네트에게 총리직을 물려준 뒤에도 서열 2위인 상원의장을 맡아 막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유엔 마약범죄사무소(UNODC)는 캄보디아의 중국계 범죄조직들이 일부 권력층과 결탁해 범죄단지를 ‘면허받은 구역’처럼 운영해왔다고 지적했다. 범죄조직은 매달 거액을 상납하고, 부패한 권력층과 공권력은 범죄조직의 뒷배가 된다. 과거 무법천지 ‘마굴(魔窟)’로 불린 홍콩 ‘구룡성채’는 비할 바가 아니라는 얘기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캄보디아의 부패인식지수는 지난해 기준 180개국 중 158위다. 제이컵 심스 미국 하버드대 아시아센터 객원연구원의 ‘정책과 패턴: 글로벌 안보 위협으로서 캄보디아의 국가 공모 초국가 범죄’ 보고서에 따르면 범죄조직들이 연간 벌어들이는 자금 규모는 125억~190억 달러(약 18조~27조 원)로 캄보디아 국내총생산(GDP)의 25%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훈센 전 캄보디아 총리(오른쪽)와 천즈 프린스그룹 회장이 2022년 캄보디아 평화궁에서 만났다. 캄보디아 데일리
훈센 정권과 영합한 프린스그룹
캄보디아에서 무소불위 힘을 휘두르는 범죄조직으로 프린스그룹을 꼽을 수 있다. 캄보디아 최대 범죄조직 프린스그룹의 우두머리인 천즈(陳志·38) 회장은 엄청난 불법자금을 축적해 범죄 제국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과 영국 정부는 10월 14일(이하 현지 시간) 캄보디아에서 부동산 개발, 금융, 관광, 물류, 식음료 등 사업체를 운영하는 프린스그룹을 ‘초국가적 범죄조직’ ‘거대 사이버 사기 제국’으로 규정하고, 프린스그룹과 천 회장에 대해 공동 제재에 나섰다.미국 법무부는 천 회장을 온라인 투자 사기, 강제 노동, 돈세탁 등 혐의로 기소했고 150억 달러(약 21조4000억 원) 상당의 비트코인 12만7271개를 압수했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도 천 회장과 그의 회사가 보유한 런던 소재 부동산 19개 등 자산을 동결했다. 그중에는 가치가 최대 1억 파운드(약 1900억 원)에 달하는 부동산도 포함됐다.
1987년 중국 푸젠성에서 태어난 천 회장은 2014년 캄보디아 국적을 취득한 뒤 2020년부터 훈센 전 총리와 훈마네트 총리의 정치 고문으로 활동하는가 하면, ‘옥냐’(Oknha·국가공신) 칭호도 받았다. 또한 캄보디아 교육부 등 정부 부처와 협력해 다양한 장학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하지만 그가 운영하는 프린스그룹이 납치·취업사기·인신매매 등으로 끌어들인 인력을 불법 온라인 도박, 로맨스 스캠, 보이스피싱, 자금세탁 등에 동원해온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천 회장은 범죄조직을 직접 운영·감독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천 회장은 현재 도주 상태다.
특히 UNODC는 시아누크빌 경제특구 내 주요 범죄조직이 ‘14K’ ‘선이온(新義安)’ 등 중국 삼합회 일파라고 지적했다. 이들 조직은 2017년부터 시아누크빌 경제특구로 들어가 카지노 사기 도박, 온라인 사기, 인신매매 등 각종 범죄를 벌이고 있다. 작은 어촌이던 시아누크빌은 중국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따라 도로와 철도, 대형 항만시설이 들어선 도시로 성장했다. 이때 마카오 지역 카지노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삼합회 조직들이 시아누크빌로 대거 이동했다. 중국 정부가 마카오 카지노와 연계된 범죄조직을 대대적으로 단속하자 본거지를 이전한 것이다. 그중에는 ‘부러진 이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14K의 두목 완 콕코이(尹國駒)가 있다. 그는 2018년 캄보디아에 진출해 ‘세계 홍먼 역사문화협회’를 설립하고 암호화폐 개발·출시, 부동산 사업 등을 벌였다. 시아누크빌 범죄단지에서 주로 활동해온 쉬아이민(徐愛民·63), 둥러청(董樂成·57), 셔즈장(佘智江·43) 등 범죄조직 우두머리들도 삼합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이들은 중국에서 범죄 혐의로 실형을 받거나 재판 전 도주한 인물들이다.
해외 투자액 절반이 중국으로부터
캄보디아 정부가 범죄조직을 제대로 단속조차 못 한 것은 중국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캄보디아는 동남아시아 국가 가운데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가장 적극 협력해왔다. 캄보디아개발위원회(CDC)에 따르면 1~9월 해외 전체 투자액의 53%가 중국으로부터 왔다.중국계 범죄조직들이 각종 불법행위를 자행하고 있는데도 캄보디아는 중국의 투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대캄보디아 투자액은 지난해 기준 31억6040만 달러(약 4조5000억 원)로 전년 대비 39% 증가했다. 게다가 캄보디아 전체 부채 116억 달러(약 16조5300억 원) 가운데 중국의 비중은 30%나 된다. 중국은 캄보디아의 최대 채권국이다. 말 그대로 캄보디아는 중국이 파놓은 ‘부채의 덫’에 걸린 셈이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는 캄보디아를 사실상 중국의 경제 식민지로 간주하고 있다. 중국은 그동안 훈센 전 총리는 물론 훈마네트 총리를 강력하게 후원했고, 캄보디아에 대규모 무기 등도 지원했다. 중국 차관으로 연명하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캄보디아 정부로선 중국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중국계 범죄조직을 강력하게 단속·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