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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또 다른 얼굴, 혐오

혐오의 기원, 생존과 공감의 파편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공감의 또 다른 얼굴, 혐오

  • ⑴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최인철 교수. [티앤씨재단 페이스북 제공]

최인철 교수. [티앤씨재단 페이스북 제공]

보통 ‘혐오’라고 하면 인간의 본성으로 설명하려는 노력들을 많이 합니다. 인간성이 아주 안 좋은, 일부 사람들이 자기 집단이 아닌 사람들에게 하는 행위 정도로 이해하는 거죠. 

저는 우리의 생존이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졌던 부분들이 오작동이 되면 파편이 튀어 혐오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강의 부제목을 ‘생존과 공감의 파편’이라고 했는데 보통 우리는 공감의 부재, 혹은 결핍의 결과물로 혐오가 나타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공감이 과잉되거나 혹은 특정한 집단에게만 편향되게 되면 혐오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우리가 선하다고 생각되는 이 ‘공감’이 오히려 부작용으로 혐오를 나타날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에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혐오는 왜 사라지지 않는가

코로나 시대를 많은 사람들이 모든 분야의 교과서 같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통계 모형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확진 속도 등을 잘 예측하는 모형을 만들어볼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하고 철학자들은 백신이 개발되면 누가 먼저 맞느냐 같은 윤리학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사례들을 현실적으로 고민하게 되는 상황이라는 거죠. 심리학자 같은 경우에도 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연구해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세계 곳곳에서 관찰되고 있는 혐오의 사례들을 통해 도대체 혐오는 왜 생겨나는 것일까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내가 누군가를 혐오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혐오가 혐오되는 시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혐오는 사라지지 않는지. 이런 코로나와 같은 상황에서 왜 다시 등장하고 있는지는 매우 흥미 있는 주제라는 생각이 됩니다. 

혐오는 글자 그대로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전적으로는 ‘어떤 것들을 증오하고 불결함 등의 이유로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감정’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역겹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미워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혐오는 이처럼 단순한 미움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해당 대상을 회피하고 싶은 행동적인 요인까지 들어가 있는 굉장히 복합적인 감정입니다. 여기에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향해 나의 도덕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라고 여기는, 같은 인간으로 보기 어렵다는 생각들이 깊게 들어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진행하려 합니다. 혐오는 개인과 개인 사이 감정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오늘 논의에서는 집단과 집단 사이의 감정으로 국한시켜서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지나친 자존감이 만드는 혐오

그렇다면 혐오는 왜 생겨났을까요. 여러 이론들이 있을 수 있지만 두 가지를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집단인데 이 집단의 어떤 역풍으로 혐오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 하나의 그래프가 있습니다. 코로나 기간 동안 대한민국 사람들의 행복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중간에 하얀 실선 부분이 행복의 평균값인데 코로나가 처음 확산됐을 때 행복감이 떨어졌다가 3월 중순 이후, 즉 사회적 거리두기가 본격화되는 시점에 다시 떨어지는 패턴을 보입니다. 

우리 연구팀은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만큼 집단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계속 트래킹을 하고 있는데 굉장히 재미있게 나타나는 패턴이 코로나 기간 동안에 사람들의 집단주의적 태도가 강하게 증가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미 심리학이나 사회학에서는 전쟁이나 감염병처럼 생존이 극단적으로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하면 모든 게 불확실해지고 불안해지기 때문에 의지하게 되는 도구 중에 하나가 집단이라고 말해왔습니다. 사람들은 더 강력한 리더를 추구하게 되고 강력한 행동 규범들을 만들고 사생활을 일부 포기하면서까지 집단의 규범을 따르려고 하는 욕구들이 생깁니다. 이게 잘못된 방향으로 파편이 튀게 되면 다른 집단에 대한 혐오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즉 혐오는 다른 집단을 미워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내 자신에 대한 사랑, 내 집단에 대한 애착이 오작동해서 나타나는 그런 현상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는 게 제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다 혹은 남자다 하는 정체성이 강해지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자존감의 욕구가 커집니다.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욕구입니다. 이런 자존의 욕구를 해결해줄 수 있는 통로 중 하나가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집단이 중요해지면 내 안에 있는 집단 정체성. 한 개인으로서의 나를 보는 것도 있지만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나를 보는 정체성도 있는데 내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우리 집단을 우월한 존재로 보고 싶어 할 뿐 아니라 내가 속해 있지 않은 다른 집단을 폄하함으로써 ‘우리가 더 낫다’는 감정을 갖게 됩니다. 

여기에 생존에 대한 위협이 다른 집단으로부터 발생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작동하게 되면 자기 집단에 순종하고 규범을 잘 따르려고 하는 욕구와 함께 위협하는 집단에 대한 미움과 배제, 배척의 감정도 함께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상황이 딱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전에 없던 집단 간 차별이나 편견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보고 있으니 말이지요.

내가 속한 집단에만 한정하는 공감이 부르는 혐오

두 번째는 공감에 관한 얘기인데요. 공감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말이 상징하듯 우리는 공감이라는 걸 굉장히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공감’은 다른 사람 의견이나 감정을 그 사람 관점에서 이해하고 느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건 이때 ‘남 즉 타인이 누구냐’는 겁니다. 

물론 타인은 나와 가까운 사람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 나와 어떤 역사적인 경험을 공유하고 있고 사회적인 맥락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지요. 그래야만 그의 관점에서 그 사람의 감정이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걸 달리 말하면, 우리는 내가 속한 집단 내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공감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역사적인, 문화적인 시대적인 맥락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공감을 경험하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공감 자체가 매우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기가 속한 집단에만 국한되면 내 집단이 아닌 사람들을 혐오하고 차별하고 무관심해지는 그런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미국 예일 대학의 유명한 심리학자인 폴 블룸 교수가 쓴 ‘공감에 반대한다(Against Empathy)’에도 나오는 대목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집단 사람들에 대한 이타적인 행위의 수단으로써 공감만을 강조해 공감을 느껴야만 타인을 도울 수 있다고 강조하면 공감을 유발하지 않는 다른 집단 사람들, 즉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고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느낀다는 게 굉장히 어려워진다. 그래서 다른 집단 사람들에 대한 이타적인 행위가 나타날 가능성을 오히려 떨어뜨린다.’ 

저도 이 주장에 동의합니다. 여기에 또 하나 추가하고 싶은 이야기는 자기 집단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해 그 공감에 기초한 이타적인 행위를 해온 사람들이 다른 집단에 대해서는 ‘나는 그동안 충분히 했으니 안 해도 돼’하는 반응을 보인다는 겁니다. 

이걸 영어로는 ‘모럴 라이센싱(Moral Licensing)’ 즉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가증을 받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나는 그동안 충분히 다른 사람을 도왔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사람들까지 시간과 돈을 들이는 건 안 해도 된다는 심리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집단주의의 파편 혹은 공감의 파편으로 혐오가 생겼다 치더라도 지금처럼 의식이 함양되어있는 문명사회에서 혐오는 왜 없어지지 않을까요? 우리 자신도 우리 스스로를 다른 대상을 혐오하는 존재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데 왜 나도 모르게 혐오하는 태도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요.

혐오의 진화는 왜 일어나나

우선 제가 제기하는 가능성은 어쩌면 우리가 지금 혐오라고 부르고 있는 것들이 우리 안에서 진화가 돼서 어느 틈엔가 혐오라고 느끼지 못 하는 형태로 나타난 게 아닐까, 마치 바이러스처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형태로 혐오가 진화된 건 아닐까란 하는 점입니다.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얘기해볼 수 있는데요 첫 번째는 과거에는 다른 집단에 대한 미움 혹은 혐오를 이야기할 때 일방적인 미움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더 이상 통용되지 않으니까 위장이 되는데 어떤 형태냐 하면 다른 집단에 대한 좋은 생각을 일부 집어넣는 식입니다. 

예를 들면 여성에 대해 과거에는 조금 부족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졌다가 지금은 ‘여성에게는 남성에게는 없는 도덕적인 순결함이 있다’ ‘여성에겐 여성 특유의 리더십이 있다’는 식으로 추켜세우는 거죠. 하지만 이런 발언은 여성이 남성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으로 들어오는 걸 차단하는 위장이 될 수 있습니다. 

성차별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런 행동에 대한 비난을 하면 ‘아니, 내가 평소에 얼마나 여성들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지 아느냐’ 라며 변명하는 모습을 많이 보는데 어쩌면 혐오라고 하는 감정도 위장이 돼서 내가 누군가를 혹은 뭔가를 혐오하는 사람이라고 느끼지 못 하는 상태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 관점은 다른 집단이 우리 집단과 다른 차이점, 그것도 조금 열등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차이가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게 아닐까 즉 혐오의 감정을 과학적인 사실에 기초해서 생각한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겁니다. 

보통 우리는 집단 간 차이에 의해서 혐오를 경험하는데 과거에는 그런 차이가 어떤 이유에서 생겨났는지를 잘 몰랐죠. 그런데 최근 들어 유전분야 연구들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인간의 많은 특성들을 생물학적 기초로 설명하려는 노력들이 이루어지면서 신체 특징뿐 아니라 심리적 특징까지도 어떤 유전적인 특징들의 조합에 의해 생겨난 것들이라는 인식, 소위 유전적 결정론이 굉장히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게 혐오를 정당화시키는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혐오의 은밀한 속성 성찰하기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선은 혐오가 가지고 있는 은밀한 속성들, 즉 공감의 뒷면일 수 있다는 걸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금 속해 있는 국지적인 집단에 가두는 것을 지양할 필요가 있겠다는 겁니다. 즉 한국사람, 서울 사람, 어느 지역 사람이라는 아주 좁은 정체성에서 벗어나 보편적 인류애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거죠. 

공감이 갖고 있는 위험성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공감만이 이타적인 행위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혐오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 공감과 같은 착한 마음도 중요하지만 그런 마음을 갖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을 돕고 배려하고 이해하는 행동이 나올 수 있는 시스템과 제도를 갖춰놓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는 겁니다. 

시스템을 갖추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 자신의 내부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중요하다는 것도 말하고 싶습니다. 다른 집단에 대해 갖고 있는 우호적인 생각이 어쩌면 그 집단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한 위장된 혐오는 아닌지, 또 우리 집단에 대한 충성이나 애착이 다른 집단에 대한 협동, 이타적인 행위를 하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은 되고 있지 않는지 끊임없이 성찰하는 거지요. 

이것으로 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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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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