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9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 마련된 4·29 재·보궐선거 상황실에서 3곳의 승리를 확정 지은 새누리당 지도부가 밝은 표정으로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강석호 제1사무부총장, 유승민 원내대표, 김무성 대표, 이군현 사무총장, 김을동 최고위원.
김 대표에게 이번 재보선 과정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것과 마찬가지였다. 선거전 초반만 해도 “잘하면 4곳 모두 가능할 것”이란 기대가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전통적 강세 지역이던 인천 서강화을, 신상진 당선인의 지역 기반이 비교적 탄탄했던 경기 성남중원 등 2곳에선 일찌감치 승리를 자신했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서울 관악을에선 대권후보까지 지냈던 정동영 전 의원의 무소속 출마로 야권 지지층의 분열이 예상되면서 조심스레 이변을 기대했고, 내친 김에 야당 ‘텃밭’이지만 천정배 전 의원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마찬가지로 야권 표가 양분될 공산이 커진 광주 서을까지 염두에 뒀을 정도다.
위기 속 해결사 본능 발휘
하지만 누구도 예상 못 했던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터지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 7명이 포함된 권력 실세 8명이 한꺼번에 ‘검은돈’ 의혹에 휩싸인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정권 2인자인 현직 국무총리와 전·현직 대통령비서실장 3인의 이름이 나란히 리스트에 올랐고, 일부 친박(친박근혜)계 실세 의원과 광역단체장들에게 건넸다는 돈은 불법 대선자금 가능성으로 확대됐다.
여론은 순식간에 싸늘해졌고, 새누리당은 전패 위기에 몰렸다. 여의도연구원의 자체 여론조사 결과 인천 서강화을에선 새정치민주연합에 뒤지는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고, 경기 성남중원에서도 상대 후보에게 오차범위 내 추격을 허용했다. 서울 관악을에서의 이변에 대한 기대도 물 건너가는 듯했다. 선거 실무를 총괄한 이군현 사무총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정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암담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김 대표의 리더십이 빛을 발했다. 성완종 사태 초반 휴일인데도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해 ‘성역 없는 수사’를 촉구했고, 이어 특별검사(특검) 수용 의사까지 밝히는 정공법을 택했다. 또 야당의 대선자금 수사 요구에 여야 동시 수사를 주장하며 역공을 펼치는가 하면, 노무현 정부의 성완종 특별사면(특사) 의혹을 부각함으로써 이번 파문의 프레임 자체를 변화시켰다. 그러면서도 박 대통령의 중남미 순방 도중 이완구 총리의 자진사퇴를 끌어냈다. 이번 위기가 최악으로 치닫는 것을 차단하면서 오히려 여론을 역전한 것이다.
이를 두고 당 안팎에선 5선 관록의 정치력과 결단력은 물론, 해결사로서의 능력도 보여줬다는 호평이 잇따르고 있다. 한 비례대표 초선의원은 “왜 김 대표를 ‘무대’(무성 대장)라 부르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고 말했다.
朴心에 기대지 않은 자력 승리
새누리당이 4·29 재보선에서 압승을 거둔 뒤 가장 주목받는 이는 단연 김 대표다. 승부사 혹은 해결사라는 별칭은 자연스러워졌고, 여권 내 차기 대권주자로서 입지를 굳혔다는 분석도 뒤따른다. 성완종 파문이라는 메가톤급 악재를 뚫고 집권여당의 ‘수도권 싹쓸이’를 견인해내면서 박 대통령의 안정적인 국정운영과 함께 새누리당의 내년 총선 및 후년 대선 전망을 밝혀놓은 공로에 대한 당연한 평가다.
김 대표에게 이번 재보선 승리가 의미 있게 다가오는 건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다. 먼저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야를 통틀어 큰 격차로 수개월째 대선주자 1위를 고수하는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첫 맞대결에서 압승을 거뒀다는 점이다. 여야 대표를 맡고 있는 두 사람 간 대결은 사실상 차기 대선의 개괄적인 밑그림일 수 있다는 점에서 진작부터 정치권 안팎의 관심이 높았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승부는 싱거웠다. 김 대표는 민심의 바로미터로 여겨지는 수도권 3곳 모두를 석권한 반면, 문 대표는 텃밭인 광주 서을과 야권의 아성으로 여겨지던 서울 관악을을 모두 빼앗겼다. 문 대표 처지에서도 2·8 전당대회 이후 당권을 거머쥔 뒤 처음 치르는 선거라는 점에서, 특히 야권 분열이라는 악재와 성완종 파문이라는 호재가 동시에 대두돼 본격적인 평가의 장이란 점에서 꽤나 중요한 선거였지만 고비를 넘지 못했다.
김 대표에게는 이번 재보선 승리가 ‘박심(朴心)’에 기대지 않고 사실상 자력으로 일군 것이란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 성완종 파문으로 인한 고비마다 그는 자신의 결단과 정치력으로 새누리당의 숨통을 틔웠다. 한 측근 의원은 “박 대통령 주변 인사들이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올랐으니 솔직히 박심에 기댈 수 없는 선거였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지난해 7·14 전당대회 승리 이후 보름여 만에 전국 15곳에서 ‘미니 총선’으로 치른 7·30 재보선에서도 압승을 거뒀다. 그런데 곰곰이 되짚어보면 당시에도 김 대표는 박심에 기대지 않은 상황에서 11 대 4 대승을 이끌었다. 6·4 지방선거에서 한 차례 호된 민심을 확인했다지만, 7·30 재보선 역시 세월호 참사라는 악재 속에서 치른 선거였다. 집권여당 대표 자격으로 치른 두 차례 선거를 모두 ‘김무성 선거’로 치른 셈이다. 김 대표 측 관계자는 “박 대통령처럼 ‘선거의 여왕’이란 칭송을 받기는 어렵겠지만 출마 후보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치인이란 인식은 심어준 것 같다”고 자평했다.
김 대표가 집권여당 대표로서 자력으로 선거 승리를 일군 건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의 일방 우위로 흐르던 당청관계의 변화도 예고한다. 박 대통령이 4월 16일 중남미 순방 출발시간까지 미뤄가며 김 대표와 단독회동을 한 건 상징적이다. 성완종 파문으로 총리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국정의 무게중심이 김 대표에게로 나눠지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4·29 재보선 승리는 이 같은 흐름을 가속화할 공산이 크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앞으로 김 대표가 박 대통령에 대해 그 나름의 여유와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늘 아래 태양이 2개일 수 있나
이번 재보선을 통해 김 대표의 강화된 입지는 곧바로 대권가도에서 순풍으로 이어지는 분위기다. 무엇보다 성완종 파문의 여파로 이 전 총리와 홍준표 경남도지사 등 잠재적 경쟁자들이 상처를 입었고, ‘비주류 당대표’를 견제해온 친박주류는 민심의 외면을 받는 상황이 됐다. 이를 두고 신율 교수는 “김 대표의 대권가도에 청신호가 켜진 건 분명한 사실”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김 대표 주변에서는 이 같은 상황을 반기지만은 않는 듯하다. 김 대표와 가까운 한 수도권 의원은 “본인 뜻과는 상관없이 너무 일찍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상당한 부담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아직 대선이 2년 반이나 남은 만큼 당 안팎에서 이런저런 견제를 받고 견뎌내야 할 시간이 너무 길어지게 됐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김 대표의 위기 및 상황 관리 능력이 중요하다는 조언이 많다. 김 대표와 15대 국회 초선 동기인 한 중진의원은 “앞으로 대선까지 2년 반이 훨씬 더 남았기 때문에 상처받고 비판받을 상황이 굉장히 많을 것”이라며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 못지않게 거친 공세와 비난을 넘어설 수 있는 상황 관리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아직 박 대통령의 임기가 반환점도 돌지 않았다는 점 또한 김 대표 측에는 다소 부담일 수 있다. 한 영남권 친박계 핵심 의원은 4·29 재보선 이튿날 대권주자로서 김 대표의 입지가 강화될 것이란 분석에 대해 “하늘 아래 태양이 2개일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김 대표를 중심으로 여권 내 구심력이 형성될 경우 어떤 식으로든 박 대통령 주변에선 원심력이 작동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새누리당 안팎에선 김 대표가 최소 연말까지는 ‘낮은 자세’를 유지할 것이란 분석이 많다. 아직은 박 대통령의 서슬 퍼런 현재권력이 정국을 끌어가는 핵심 파워인 만큼 당장 이와 맞서지는 않을 것이란 예상이다. 그런데 이는 동시에 내년 총선을 지나면서부터는 ‘김무성의 정치’가 본격화할 것이란 전망과 같은 맥락이다.
김 대표 측 관계자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새누리당의 내년 총선 승리와 내후년 대선 승리 아니냐”면서 “김 대표로서는 박근혜 정부 공과를 안고 가야 하는데 ‘공’을 앞세울지 ‘과’를 앞세울지는 정치적 상황에 달렸다”고 말했다. 미래권력(김 대표)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에선 불가피하게 현재권력(박 대통령)을 부정할 수도 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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