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4일 교육부가 일제고사(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 폐지를 발표했다. 20일 예정된 시험을 불과 엿새 앞두고서다. 교육부는 이날 전국 응시 대상자의 3%만 표집해 예정대로 시험을 치르겠다고 밝혔다. 나머지 학교 학생의 응시 여부는 각 시·도교육청이 정하도록 했다. 현재 전국 17개 시·도교육청 중 13개가 일제고사를 반대해온 이른바 ‘진보’ 성향의 교육감 지역이라는 점에서 이번 평가에 자율적으로 참여할 학교는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도입한 뒤 수차례 정책이 바뀌며 논란을 낳았던 일제고사가 사실상 사라지게 됐다.
교육부의 전격적인 결정 이후 교육계는 크게 술렁이는 모양새다. 특히 ‘문재인발(發) 교육개혁’ 2탄이 무엇이 될 것인지에 촉각이 곤두서 있다.
사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 후 일제고사를 없애리라는 건 이미 예상됐던 바다. 주요 대선 공약 가운데 하나였고, 다른 개혁 조치에 비해 반대 목소리도 크지 않아서다. 그런데도 이번 조치가 교육계를 놀라게 한 건 결정 방식과 시기 때문이다.
교육개혁 드라이브 걸겠다는 대통령의 시그널?
현재 문재인 정부는 내각 구성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다.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이 교육부 장관 후보자로 정해졌지만 국회 인사청문회 등 거쳐야 할 관문이 많다. 장관이 없는 상황에서 각종 현안이 발이 묶인 상태다. 그런데 전국 응시 대상자 93만여 명 분의 시험지가 이미 인쇄까지 끝난 상태에서, 장관도 공석인 교육부가 전격적으로 ‘일제고사 폐지’를 선언했다. 그것도 진보교육감이 다수를 차지하는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가 국정기획자문위원회(국정기획위)에 ‘일제고사를 즉각 중단하자’고 제안한 지 불과 닷새 만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강력한 교육개혁 의지를 보여주는 신호탄이라는 평가다. 집권 초기 문 대통령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코드’가 맞는 교육감들과 더불어 각종 교육개혁 정책 추진에 드라이브를 걸 것임을 천명한 조치라는 분석도 나온다.박광온 국정기획위 대변인은 교육부에 일제고사 폐지를 제안한 이유에 대해 “전국 모든 중3, 고2 학생이 국·영·수 시험을 의무적으로 치르는 것은 새 정부가 지향하는 ‘경쟁을 넘어서는 협력교육’과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이러한 ‘협력교육’을 확산하기 위한 정책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절대평가 △고교학점제 △고교 내신 성취평가제(절대평가) △자사고·외고 폐지 등을 제시했다. 문제는 대학입시와 직결된 위 정책들이 하나같이 우리나라 교육체계 전반을 뒤흔들 수 있는 논쟁적 주제라는 점이다. 모든 정책이 유기적으로 얽혀 있어 하나만 떼어내 추진하기도 힘들다.
예를 들어 수능 절대평가는 수능 점수 1점 차이로 대입 당락이 갈리는 현실에서 ‘문제 풀이’ 교육에 치우쳐 있는 고교 현장을 정상화할 방법으로 제안된 것이다. 문 대통령의 핵심 교육공약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수능이 절대평가로 바뀌어 입시 변별력이 줄어들면 이를 보완할 다른 전형요소가 필요해진다. 이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 고교학점제다. 고교의 필수교과를 최소화하고 학생 교과 선택권을 확대하는 시스템이 정착되면 학생들은 원하는 수업을 자유롭게 신청해 수강할 수 있다. 해당 수업의 수강 기록과 담당 교사가 관찰한 특기사항 등은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에 기재돼 대학입시 자료로 쓰이게 된다.
단, 고교학점제가 정착하려면 내신 성취평가제 도입이 필수적이다. 고교 내신 상위 4%까지 1등급, 4〜11%는 2등급을 받는 현행 9등급 상대평가제가 유지될 경우 수강생이 적은 과목을 선택하는 학생이 대입에서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따른 대안으로 마련된 것이 학생이 일정 수준 이상 학업성취도를 보이면 등수와 무관하게 A~E등급 가운데 하나를 부여하는 성취평가제다.
문제는 외고·자사고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고교 내신 성취평가제를 시행할 경우 이들 학교가 대입에서 더욱 강력한 경쟁력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성적 우수자가 모여 있는 외고·자사고 학생들은 현행 내신 상대평가제 아래서 더욱 치열하게 내신 경쟁을 벌인다. 이를 피하려고 일반고에 진학하는 학생도 있다. 그런데 성취평가제 하에서는 외고·자사고 학생 전체가 내신 A등급을 받을 길이 열린다. 이는 고교 간 격차를 부추기고, 고입 사교육을 확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다.
이렇게 하나의 고리처럼 맞물린 ‘문재인표 교육개혁 정책’ 가운데 가장 먼저 논의 테이블에 오른 건 외고·자사고 폐지 문제다.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장인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이 6월 13일 기자간담회에서 “앞으로 학교를 계층화, 서열화하는 외고·자사고를 재지정하지 않고 일반고로 전환할 계획”이라고 밝히며 ‘총대’를 멨다.
자사고·외고 문 닫을까
현행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시행령)에 따르면 시·도교육감은 외고 및 자사고에 대해 5년에 한 번씩 학교운영 성과 등을 평가하고, 결과가 미흡할 경우 특목고 지정을 취소한다. 이 권한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이 교육감과 마찬가지로 진보성향인 조희연 서울시교육감도 이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특목고에 관해 규정한 시행령 제90조 5항에는 교육감이 특목고 지정을 취소하려면 ‘미리 교육부 장관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교육감의 일방적 외고·자사고 폐지를 막으려고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 조항은 정부와 시·도교육청의 의견이 같을 경우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는 외고 31개교, 자사고 46개교가 있으며 이 중 외고 14개교, 자사고 25개교가 서울·경기지역에 몰려 있다. 이곳에서 외고·자사고 지정 취소 움직임이 시작되면 전체 교육계에 미치는 여파가 적잖을 전망이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좋은교사운동 등 시민사회단체는 외고·자사고 폐지를 시작으로 일련의 교육개혁 정책이 추진되면 점수와 등수 위주 교육 현실에 근본적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기대하는 분위기다. 반면 일각에서는 학교 현장의 혼란이 가중되고 그 틈을 노린 사교육이 더욱 성행할 것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현재 중3 자녀를 둔 한 학부모는 “일반고 사이 교육 격차가 분명한 상황에서 문 대통령 공약대로 외고·자사고가 사라지고 수능이 자격고사화되면 교육환경이 좋은 서울 강남지역 고교의 인기가 오히려 치솟는 부작용이 발생할 것”이라며 “또 만약 대학들이 ‘변별력 부족’을 이유로 본고사를 만들면 내신은 내신대로, 본고사는 본고사대로 준비하느라 사교육 부담이 더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지금까지 특목고 입시, 수능 대비 등에 강점을 보여온 사교육업계도 불안해하는 학생, 학부모와 함께 ‘일전’을 준비하는 모양새다.
당장 서울시교육청은 6월 안에 경문고와 세화여고, 장훈고 등 관내 자사고와 서울외고 등 외고에 대한 평가 결과를 공개한다. 이 중 평가 점수가 60점 미만인 학교가 나오고, 교육부가 해당 학교의 특목고 지정 취소에 동의하면 문재인 정부의 교육정책을 둘러싼 ‘진짜 싸움’이 시작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