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 서울 중구 한 식당에 모인 ‘한솥회’ 회원들.
수치스럽고 창피한 과거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천마동(현 천마군 천산리) 제7포로수용소(천마포로수용소) 출신의 국군포로. 이들 대부분은 1951년 5월 현리전투에서 패한 뒤 포로가 됐고 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의 포로교환원칙에 따라 귀환했다. 남한에 돌아온 국군포로 8333명 가운데 천마포로수용소 출신은 800여 명에 달한다. 당시 귀환한 천마포로수용소 국군들은 ‘한솥회’를 만들어 40여 년 전부터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얼굴이 조그맣게 실리는 건 괜찮지만 이름을 공개하는 건 불명예”라며 한사코 익명을 요청한 국군포로들. 이들에겐 과연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정전 60년 만에 처음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국군포로들을 만나 그간의 삶을 물었다.
▼ 한솥회란 모임을 만든 이유는 뭔가.
A : 나는 이 모임을 한솥회로 부르기 싫다. 인민군들한테 밥을 얻어먹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귀순용사회라고 해야 맞지 않나 싶다.
B : 다수가 모임 이름을 한솥회라고 하는 데 동의했으니 그렇게 불러야 한다. 그전에는 끼리끼리 만났다. 그러다 국군포로 출신이 운영하는 명동 가게를 중심으로 하나둘 모였다.
C : 강동포로수용소, 안주포로수용소에 있던 사람들도 모임에 나왔지만 천마포로수용소 출신이 대다수였다.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긴 사람들이 죽는 날까지 형제같이 지내자’ ‘식구처럼 한솥밥을 먹고살았던 것을 잊지 말자’며 ‘한솥회’라고 지었다. 우리는 1928~33년생으로 나이가 제각각이지만 동갑내기나 다름없다. 그곳에서 나온 뒤 새 인생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 한솥회는 60년 전 돌아온 국군포로들의 유일한 모임인데, 그동안 왜 공개하지 않았나.
A :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이 나이가 됐는데도 내가 포로였다는 사실이 창피하다. 나는 교사인데 혹시 학생이나 동료교사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나를 무시했겠나.
B : 미국에서는 포로가 국가 영웅으로 대접받는다지만 우리는 상황이 다르다.
D : 우리는 최전선에서도 명령을 완수한 사람들이다. 사상 전향도 하지 않았다.
E : 한 지역의 6·25 참전용사회 회장을 맡으면서도 국군포로였다는 것을 공개할 수 없었다. 포로란 사실을 드러내면 연금을 더 받았을지 모르겠지만 해로운 점이 많지 않았을까.
F : 우리 세대는 일본 군국주의 영향을 많이 받아 ‘포로가 되는 것보다 자결하는 게 낫다’고 여긴다. 한 번은 친구 아버지를 찾아가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당신 아들과 함께 생활했다”며 소식을 전해준 적이 있는데 그다음에 찾아가니 피하더라. 하물며 아들이 북에 있는 사람도 저런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싶어 이후 누구에게도 국군포로였다고 말하지 않았다.
▼ 군 입대는 언제 했나. 언제 포로가 된 건가.
C : 1950년 12월 16일 중학교 6학년(고교 3학년) 때 졸업도 하지 못한 채 입대했다. 화물차를 타고 일주일 동안 달려 도착한 곳이 부산진훈련소였다. 대구에서 입대한 뒤 전진하다 51년 5월 현리전투에서 포로가 됐다.
B : 중학교 4학년(고교 1학년) 때 병역의무가 없는데도 영장이 나와 1950년 12월 30일 입대했다. 서울에서 집합한 뒤 12일 동안 걸어가 대구에서 군인이 된 것이다. 이후 하사관학교에서 9주 동안 훈련받고 일선으로 나간 지 한 달도 안 돼 현리전투에서 포로가 됐다.
D : 나는 이북에서 넘어와 서북청년회에 들어갔다 1948년 5월 27일 입대했다. 그 뒤 국군창설요원으로 전투에 임했다가 51년 5월 17일 설악산전투에서 국군포로가 됐다.
E : 1947년 국방경비대에 들어간 뒤 국군으로 싸우다 51년 11월 동두천에서 포로가 됐다.
2년 동안 수많은 사람 죽어나가
▼ 포로 생활 가운데 기억나는 점을 얘기해달라.
A : 강동포로수용소, 철산 모나즈석 광산을 거쳐 천마수용소로 갔다. 벌목이 주 업무였지만 아침과 저녁에는 정치학습, 정치토론을 해야 했다. 교육내용이 세뇌됐는지 아닌지를 심사하는 게 가장 무서웠다. 불만이 많은 사람은 반동분자로 찍혀 수용소 내 영창으로 보내졌다.
B : 천마포로수용소에 가기 전 철산 모나즈석 광산에서 일했다. 당시 막사가 너무 추웠다. 30명이 나란히 붙어 잤지만 새벽 2시면 하나씩 잠에서 깼다. 한 사람이 일어나면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 잠이 달아났다. 이질이 유행해 화장실에 가다 변을 보기도 했다.
C : 나는 산에 가서 나물을 캐야 했는데 실적이 좋지 않았다. 그때마다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못했다”는 말을 연발하다 보니 자포자기했다. 그때 기억 때문인지 남한에 돌아와서도 나 스스로가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D : 옷이 없어 2년 동안 갈아입지 못했다. 사람이 죽으니까 몸이 파랗게 되면서 이가 기어 나오더라. 그 시체를 변소에 옮겨 이를 털던 기억이 난다.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밥 한 끼가 옥수수 13알이었다. 배고파서 쥐까지 먹었다. 독초를 먹고 죽은 사람도 있다. 영양 부족으로 야맹증에 걸려 밤이 되면 잘 보이지 않았다. 70%가 굶어죽었다.
A : 내 추측으론 40%가 죽은 것 같다. 5개 중대가 있었는데 그중 5중대는 환자중대였다. 그곳에 가면 거의 다 죽어서 나왔다. 나도 5중대에 두 번이나 갔지만 다행히 살아나왔다. 해빙기마다 열병이 돌았다. 군의관 출신 포로들이 인플루엔자라고 했는데 아마도 영양실조로 면역력이 떨어져 열감기로 사망한 것 같다.
D : 가까운 사람을 감시하는 일이 힘들었다. 천마포로수용소에 갔더니 군대 후임 2명이 찾아와선 “내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며 사라지더라.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은 내 뒷조사를 하라는 지령을 받았던 것이다. 심지어 나도 그 두 사람을 감시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 포로 교환 대상자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나.
A : 이북 출신, 공산주의자를 제외하면 남한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공산주의를 부정한 반동분자는 갈 수 없었다. 가족 때문에 남한에 가겠다고 한 사람은 보내준 반면, 남한 체제가 좋아서 가겠다는 사람은 반동분자로 찍혀 나오지 못했다. 나만 해도 고향이 황해도인데 가호적이 서울인 덕에 나올 수 있었다. 서울 말씨로 말해 심사관을 속였다.
D : 진짜 고향은 황해도다. 하지만 고향이 만주고 숙청당한 후 이북에서 살아 이북 말투를 쓴다고 둘러댔다. 빈농 출신을 우대했지만, 나는 정미소를 운영한 중농이라고 말했다. 그럴듯하게 말해야 솔직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것 같았다. 이런 신상조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했다.
F : 누군가를 밀고하거나 상사를 하대해 어쩔 수 없이 공산주의를 택한 사람도 있었다.
▼ 남한에 돌아와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F : 나는 야뇨증, 야매증이 심해 고생했다. 군속으로 있다 포로 생활을 2년여 했지만, 군대에 입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복무를 해야 했다. 내 젊음이 아까웠다.
A : 악몽에 시달린다. 지금도 그때 꿈을 꾼다. 불안증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그곳에 가는 바람에 육체적 발육이 멈춰 후유증이 심했다. 사실 그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 얘기를 털어놓을 수 없어 힘들었다. 이북에서 사상교육을 받았을 거라고 의심받을 게 뻔했다.
G : 사실, 그때 “김일성 만세!”를 외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B : 병적을 조회하면 입대, 제대 기록만 나온다. 그 밖에 포로 기록 등은 없다. 만약 기록에 남았더라면 공무원 생활을 할 수 없었을 거다. 사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그나마 정착을 잘한 경우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생활이 어려워 모임에도 나오지 못한다.
D : 젊을 때는 1년이란 시간이 소중하지 않나. 그런데 2년여 동안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내니 다른 청년들처럼 살아가기가 어려웠다. 사회에 적응할 때 나라로부터 받은 도움이 전혀 없다. 하긴 이북에 억류된 국군포로를 송환할 능력도 없는 정부 아닌가.
절대 용감하게 싸우지 마라
1953년 정전협정을 계기로 돌아온 국군포로를 반기는 모습.
F : 그때 국군포로가 어디에 묻혔는지 잘 안다. 수용소 뒤편에 무더기로 묻었다. 나중에 가짜로 팻말을 붙였을 뿐이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국군포로 시신을 발굴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우리 증언이라도 채록해라. 어느 누구도 국군포로 경험에 귀 기울이지 않아 아쉽다.
B : 국회에서 ‘6·25 소년병 지원에 관한 법률’이 발의됐는데 계류 중이다. 군대에 갈 나이가 아닌데도 군복무를 하는 바람에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보상해줘야 한다.
C : 우리가 정부에 뭘 해달라고 말하기보다 나라에서 먼저 우리를 생각해주는 게 맞지 않나. 우리는 매달 6·25 참전용사수당을 중앙정부로부터 15만 원, 지방자치단체로부터 3만~5만 원을 받는데, 국군포로가 정부로부터 받는 혜택이 매달 19만 원뿐이라면 너무 싸지(적지) 않나.
D : 얼마 전 군대에 가는 손자에게 “절대 용감하게 하지 말고 피할 건 피하고 절대 잘난 체하지 마라”고 했다. 나만 해도 열심히 싸우다 국군포로가 됐지만 전사 처리가 되는 바람에 어디에도 취직할 수 없었다. 국군포로 출신에 대한 대우가 이렇다면 누가 전쟁에 나서겠나.
E :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없어진 사람이 많았다. 반동분자로 찍혀 남한에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가 의외로 많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그런 국군포로를 찾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80세 넘은 국군포로들이 죽기 전 돌아올 수 있게 정부가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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