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수석 입학생에게 비결을 물어보면 늘 ‘국어, 영어, 수학을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동안 보통 학생들은 ‘영·수’ 공부에 치중해 국어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요즘 들어 국어도 영·수 못잖게,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생기고 있죠.”
‘대치동 샤론 코치’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입시컨설턴트 이미애 씨의 얘기다. 그에 따르면 최근 서울 대치동을 위시한 강남 사교육 중심지에서 국어를 입시 전략과목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뚜렷하다. 2월 강남 한 국어 전문학원 초등부 모집설명회 제목은 ‘초등 독서, 대입의 시작’이었다. 고교생 대상 국어학원도 지난겨울 ‘올해 대입 성패를 가르는 과목은 국어가 될 것’이라는 내용의 입시설명회를 경쟁적으로 열었다.
2017 ‘불수능’의 핵심은 ‘국어 변별력’
진학지도를 전문으로 하는 ‘이병훈교육연구소’의 이병훈 소장은 “우리나라에서 교육특구로 소문난 지역 학생들의 경우 주중 방과 후에 영어·수학학원에 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요즘 주말, 공휴일에 국어수업, 독서·토론 그룹 과외 등을 받는 사례가 늘고 있다.입시교육에서 영어, 수학이 중시되는 건 여전하지만 국어가 이전보다는 분명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고교생 자녀를 둔 직장인 최모 씨도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아이가 주말마다 집에 와 집중적으로 학원 수업을 듣는데, 영어·수학학원에 최근 국어학원을 추가했다”고 전했다.
이런 변화는 11월 16일 치르는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에서 영어가 절대평가로 바뀌면서 각 대학이 영어의 입시 반영 비율을 낮춘 데 따른 것이다.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지난해 말 서울 주요 15개 대학과 7개 지방거점국립대의 수능 과목별 반영 비율 변화를 분석한 것에 따르면 이들 대학의 2018학년도 정시모집 영어 반영 비율은 전년 대비 9.1% 줄었다.
영어 과목이 입시에 미치는 영향력도 크게 낮아졌다. 서울대는 영어 1등급(원점수 90점 이상)과 최하등급(9등급·19점 이하)의 점수 차가 4점에 불과하다. 영어로 변별력을 얻기가 어려워지자 대입의 새로운 열쇠 과목으로 국어가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2017학년도 수능에서 국어 과목 난도가 눈에 띄게 높아진 것 역시 이러한 흐름을 가속화했다고 분석한다. 지난해 수능은 변별력이 큰 ‘불수능’으로 평가받았다. 정부가 밝힌 쉬운 수능 기조와 달리 전반적으로 난도가 높았고, 특히 국어가 어려웠던 것으로 평가됐다.
지난해 수능 국어에서 만점을 받은 수험생의 표준점수는 139점으로 수학 만점자의 표준점수(가형 130점, 나형 137점)보다 높았다. 표준점수는 수험생의 원점수와 평균점수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로, 평균이 낮아지면 표준점수 최고점이 높아진다.
이러한 ‘2017 수능 효과’는 즉시 대치동을 위시한 사교육시장에 불어닥친 것으로 보인다. 명실상부 ‘이제는 국어’라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이에 따라 올해 초부터 학원가에 국어 수강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강남에서 국어 전문학원을 운영하는 한 입시 전문가는 “교육부가 수능 영어 절대평가 전환 방침을 밝힌 건 2015년이다.
이후 한동안 수학 관련 사교육시장이 들썩였다. 그러나 얼마 후부터 수학 시험 난도가 지나치게 높아 중고교생 상당수가 수학 공부를 포기한다는 이른바 ‘수포자’(수학 포기자) 문제가 사회 이슈로 부상하지 않았나. 그 결과로 공교육을 정상화하려면 수능 수학을 쉽게 출제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대치동에서는 수학도 머잖아 절대평가로 전환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며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과목은 국어뿐”이라고 주장했다.
국어가 학종의 희망?
3월 서울교육청 주관으로 실시된 올해 첫 전국연합학력평가(학평) 역시 국어의 난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입시 전문업체 ‘비상교육’은 이에 대해 “화법, 작문, 문법 영역은 교과서에 나오는 개념을 바탕으로 평이하게 출제됐으나 독서 영역이 전체적으로 까다로웠고 문학에서도 생소한 작품이 많이 출제돼 학생들이 푸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수능 국어는 △화법 △작문 △문법 △독서(비문학) △문학 등의 영역을 평가한다.
사교육 전문가들에 따르면 지난해 수능 국어에서 오답률이 높은 것으로 분석된 10개 문항 중 8개가 비문학 영역에 속했다. 많은 학생이 이 영역을 어려워한다는 게 확인된 셈이다. 그런데 이번 학평에서도 이 영역에 난도 높은 문제가 집중됐다. 서울 강남에서 활동하는 국어 전문 사교육 강사는 이에 대해 “최근 수능 국어 문제를 보면 문법을 아는지, 지문 내용을 잘 파악하는지 확인하는 정도의 단순한 형태에서 벗어나 수험생의 독해력과 종합적 사고력을 평가하는 방향으로 점점 변화하고 있다”며 “대입제도가 존재하는 한 시험 변별력은 필요하다. 그것을 좌우하는 과목이 국어가 될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근 대학 입시에서 수시모집의 비중이 커진 것도 국어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의 관심이 높아지는 이유다. 2018학년도 4년제 대학 수시모집 인원은 25만9673명으로 전체 모집정원의 73.7%에 해당한다. 특히 서울대가 수시 인원 100%를 학생부종합전형(학종)으로 선발하고 고려대 72.8%, 서강대 67.5%, 경희대 60.6% 등 여러 대학이 매우 높은 비율을 학종에 배분했다.
입시 전문가들에 따르면 학종 입시의 성패를 가를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비교과활동에서 ‘실적’을 채우기에 가장 좋은 것이 국어 활동이다. 잘 짜놓은 독서 목록, 교내 글짓기 대회나 논술대회 수상 경력은 바로 ‘대입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학종을 준비하는 학생은 이르면 5~6월부터 자기소개서 작성을 시작한다. 국어 전문 사교육 학원은 이를 지원하는 데도 특장점을 발휘한다.
대치동에 사는 학부모 양모 씨는 “대치동 하면 스펙이 우수한 강사가 저마다 학력, 경력을 자랑하며 각축전을 벌일 것 같지만, 실은 자기 스펙을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입시 실적이 곧 그 사람의 스펙이 되기 때문에 어느 학교에서 뭘 전공했는지 몰라도 입소문으로 ‘지난 입시에서 누구를 어디 보냈다’고 얘기가 돌면 수강생이 확 몰린다. 특히 국어 과목은 그런 사람들이 알음알음 그룹을 짜서 고가 강의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사교육 감소는 백일몽?
과연 국어 사교육으로 대학 입시에서 높은 점수를 올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과학탐구 스타 강사로 이름을 날리다 교육평론가로 변신한 이범 씨는 저서 ‘우리교육 100문 100답’에서 ‘숱한 고3 학생들을 봐왔지만 문제집을 풀어서 언어영역 점수 올린 사례는 거의 본 적이 없다’며 ‘고3을 오랫동안 담당한 현직 국어 교사들도 ‘고3 수업 들어가면 어쩔 수 없이 수능 기출문제나 EBS 문제 같은 것을 풀어주지만, 언어영역은 사실 문제풀이로 도움받을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말한다’고 썼다.평소 다양한 분야의 책을 꾸준히 읽는 것이 진정한 해법이란 것이다. 하지만 급변한 입시 환경에 맞는 해법을 찾는 학생과 학부모는 학원 문을 두드리고 있고, 이에 따라 관련 사교육시장은 계속 확대되는 분위기다.
교육부는 2015년 수능 개편 발표 당시 ‘영어 대신 국어, 수학 등의 사교육이 증가하지 않겠느냐’는 우려에 대해 “학교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한 학생이라면 어려움 없이 풀 수 있는 난이도로 출제되기 때문에 이른바 ‘풍선 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결과는 기존 영·수 사교육에 국어 사교육 부담까지 더해지는 모양새로 나타나고 있다. 안선희 중부대 진로진학컨설팅학과 교수는 “정부가 대입제도의 틀을 수시로 흔들수록 학부모의 사교육 부담이 커진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입시제도는 곧 또 바뀐다. 정부는 지금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 치르게 될 2021학년도 수능 개편안을 올해 7월까지 확정할 방침이다. 교육부는 이번 개편안과 관련해 수능 과목과 문항 수만 개편하는 데서 나아가 수능의 역할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밝힌 상태다. 김창식 엠베스트 입시전략 수석연구원은 이에 대해 “현재 초등생과 중학생 학부모는 모든 과목이 절대평가로 바뀌는 등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는 게 아닌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과탐토’ 준비생도 국어학원으로?
매년 4월 ‘과학의 달’은 학생과 학부모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로 여겨졌다. 한국과학창의재단(재단)이 매년 △과학토론 △융합과학 △기계공학 △항공우주 등 4개 영역에서 과학탐구대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이중 과학토론 분야에서 그동안 재단은 연초 당해 주제를 공개하고 참가자들이 3인 1조로 팀을 이뤄 이를 ‘탐구’한 뒤 논문 형태로 보고서를 제출하게 했다. 여기서 선발된 본선 진출자끼리 ‘토론’을 통해 순위를 가렸다.
이른바 ‘과탐토’라고 불린 이 대회 입상은 초등생에게는 영재교육원 입학, 중고교생에게는 상급학교 진학의 좋은 ‘스펙’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매년 재단이 당해 탐구 주제를 발표하면 그 내용이 즉시 주요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어로 올라갈 만큼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올해 이 대회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참가자 상당수가 사교육업체의 도움을 받아 ‘논문’ 형태의 보고서를 작성한다는 문제제기가 계속되면서 주최 측이 보고서 제출 단계를 아예 없앤 것이다. 이에 따라 올해부터 참가자들은 한자리에 모여 주제를 동시에 접하고, 주최 측이 준비한 참고자료를 읽은 뒤 토론에 나서게 됐다. 인터넷 검색 등도 금지된다.
입시컨설턴트 이미애 씨는 이에 대해 “지난해까지 과학탐구 실력이 주로 요구되는 대회였다면 이제는 많은 자료를 빠른 시간 내 이해하고 정리하는, 어찌 보면 국어 실력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바뀐 것”이라고 평했다. 이 때문에 고액을 받고 ‘과탐토 준비반’ 등을 운영하던 사교육업체에 비상이 걸렸고, 대치동 일대에서는 한동안 관련 설명회가 잇달아 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학원은 “새로워진 대회 방식에 맞춰 아이들이 실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며 강의를 진행하고 있지만, 이번 대회 방식 변경의 수혜자는 결국 국어·논술·토론학원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