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문명의 교차로 말레이시아 말라카

[재이의 여행블루스] 400여 년 서구 열강 지배 역사가 만든 독특한 다문화 도시

  • 재이 여행작가

    입력2024-12-2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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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라카 구시가지 중심에 자리한 더치 광장. [GettyImages]

    말라카 구시가지 중심에 자리한 더치 광장. [GettyImages]

    동서양의 옛 자취를 만날 수 있는 항구 도시 ‘말라카(Malacca)’. 이곳은 말라카해협의 전략적 요충지로, 해협을 끼고 향료와 도자기, 비단 등이 거래되면서 동서무역 중개지로 일찌감치 번성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며, 이후 항해술이 발달한 서양 열강들이 말라카를 인도양을 향한 거점기지로 삼고자 쟁탈전을 벌였다. 16세기 포르투갈이 가장 먼저 발을 디뎌 100년 이상 통치했고, 17세기에는 동인도회사를 앞세운 네덜란드가 200년 이상, 그리고 18세기에는 대영제국이 패권을 차지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까지 동남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삼았다. 1957년 말레이시아가 독립할 때까지 400여 년 동안 식민지였던 셈이다. 이 기나긴 시간에 열강들은 말라카 구석구석에 흔적을 남겼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말라카는 중국 중심의 동양 문화와 말레이시아 고유의 이슬람 문화, 그리고 서구 열강의 여러 문화가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다문화·다민족 도시가 됐다.

    말라카의 중심, 더치 광장

    말라카는 쿠알라룸푸르에서 차로 2시간가량 떨어져 있어 당일치기 투어로 주로 찾지만, 잠깐 머물다 가기에는 너무 아쉽다. 최소한 하룻밤 정도는 머물면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말라카의 매력을 천천히 음미해보는 것이 좋다. 굽이굽이 흐르는 강을 경계로 왼쪽에는 동양, 오른쪽에는 서양의 자취가 배어 있는데, 어느 쪽을 선택하든 3㎞ 내외 길을 따라 돌아볼 수 있다.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 시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 동서양이 결합된 생활 풍습이 이색적인 모습을 자아낸다. 도시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강변에는 전망 좋은 카페와 레스토랑이 밀집해 있다. 석양이 지고 도시에 어둠이 깔리면 조명이 켜지기 시작하는데, 말라카의 화려한 밤을 느끼고 싶다면 강변을 따라 이동하는 야간 크루즈를 꼭 타봐야 한다.

    말라카 여행의 시작은 구시가지 중심에 자리한 ‘더치 광장(Dutch Square)’에서 하면 좋다. 이곳을 기점으로 말라카에서 가장 붐비는 ‘존커거리’(19세기 노동자가 모여 살던 길)와 ‘히렌거리’(노동자를 고용했던 부자들이 살던 길), 그리고 ‘세인트폴 교회’와 ‘산티아고 요새’로 향하는 길이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더치 광장은 17세기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에 지은 붉은 건축물들이 이색적이다. 1753년 건축된 ‘크라이스트 교회’의 시계탑을 중심으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네덜란드식 석·목공예 건축물인 ‘스타더이스(The Stadthuys)’, 영국 통치 시절에 지은 ‘빅토리아 여왕 분수’ 등이 오밀조밀 모여 있어 구경하기도 편하다. 광장 중심은 1650년 네덜란드 총독과 관리들의 공관으로 들어선 스타더이스다. 네덜란드어로 시청이라는 뜻인데, 지금은 말라카의 과거를 한눈에 엿볼 수 있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광장에서 말라카해협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왼쪽으로 걸어가면 세인트폴 언덕을 만나게 된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의 고즈넉한 정취에 취해 걷다 보면 어느덧 벽체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세인트폴 교회를 만난다. 포르투갈 통치 시대인 1521년에 들어선 교회인데, 가톨릭을 박해하던 영국과 네덜란드가 파괴해 외벽만 남았다. 세월의 흔적이 만들어낸 풍경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내뿜는다. 교회 옆에는 관문만 남은 산티아고 요새가 있다. 16세기 포르투갈이 네덜란드와의 전투에 대비해 말라카해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만든 요새다. 요새에서 내려다보는 시내 전경은 고풍스럽고 아름답다. 유럽, 이슬람, 중국, 인도, 말레이가 한곳에 모두 모여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데, 이것이야말로 말라카 여행의 묘미일 것이다.

    수백 년 역사 간직한 차이나타운

    더치 광장에서 오른쪽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 강을 따라 걷다 보면 ‘성 프란시스 자비에르 교회’를 만난다. 1849년에 지은 고딕양식의 가톨릭교회로, 동아시아에 가톨릭을 전파한 선교사 자비에르를 기리기 위한 곳이다. 터치 광장에 자리한 교회들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자비에르 교회를 지나 조금만 더 걷다 보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이 펼쳐진다. 1405년부터 거대한 선단을 이끌고 인도양을 탐험했던 명나라 해군제독 정화(鄭和)가 이곳에 닻을 내린 이후 조성됐다. 정화 장군을 기리고자 1646년 건립한 ‘쳉훈텡(青云亭) 사원’은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사원이다. 이곳은 거리 전체가 문화재로 등록돼 있어 건물의 신축 및 보수가 불가능하다. 중국, 말레이, 인도, 포르투갈과 유럽풍이 한데 어우러진 차이나타운은 수백 년 역사를 간직한 채 옛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여행하면서 수백 년 동서양 문화가 융합된 차이나타운 거리를 거니는 것은 단순히 즐거움 이상의 그 무엇을 안겨준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때 그 시절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해 질 녘에는 더치 광장 반대편의 존커거리로 가보자. 좁은 골목마다 레스토랑과 카페, 기념품 가게가 빽빽히 들어서 있는데, 밤이면 더 화려한 거리로 변모한다. 금요일부터 주말까지는 거리 전체에 야시장이 열리니 시원한 맥주와 함께 말레이와 중국의 퓨전식인 뇨냐(Nyonya)도 즐겨보자.

    재이 여행작가는… 
    ‌세계 100여 개국을 여행하며 세상을 향한 시선을 넓히기 시작했다. 지금은 삶의 대부분을 보낸 도시 생활을 마감하고 제주로 이주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다양한 여행 콘텐츠를 생산하는 노마드 인생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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