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이명박 정부의 5·24 대북조치 이후 사업 통로가 끊긴 한국 기업들은 중국에서 대북 사업 파트너를 찾아야 했다. 중국 업체와 계약을 맺고 중국 법인 명의로 북한과 사업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남북한 직접거래라는 불법을 피해온 것이다. 이는 형식상 중국 법인과 북한 기업 간 거래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도 기업들이 이런 식으로 대북사업을 지속하는 것을 사실상 묵인해왔다.
남북관계의 긴장도가 정점에 오른 최근, 5년여 동안 이어진 남한과의 이러한 간접거래에 대해 뜻밖에도 북한 당국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최근 평양은 그간 중국 업체 명의로 진행돼온 남한과의 모든 상거래에 대해 중단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2월 7일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이후 박근혜 정부가 ‘개성공단 가동 중단’이라는 강경 카드를 꺼내 든 데 이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전례 없이 높은 수위의 대북제재가 추진되는 와중에 벌어진 일이다. 북한 역시 “어디 한번 해보자”며 맞불을 놓는 형국이다.
북한 나선(나진·선봉)경제특구에서 의류봉제 공장을 운영하는 중국인 A씨는 한국인 사업가로부터 투자를 받아 비즈니스를 진행해왔다. 2월 24일 밤 북·중 접경 도시에 머물던 그를 북한 측 사업 파트너가 급히 찾아와 “나선경제특구로 곧 들어오게 돼 있는 의류 원단을 보내지 마라”고 말했다. 이날 오전 평양으로부터 갑자기 ‘남쪽 물건은 무엇이든 사용하지 말라. 이제부터 남쪽과 관계된 사업은 일절 불허한다’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설명이었다. 원단을 보내면 그대로 압수될 것이므로 나선경제특구에 있던 동업자가 급히 찾아온 것이었다.
“의류 임가공, 수산물가공 치명타”
“그럼 나선경제특구 공장에 있는 우리 완성품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A씨가 묻자 북측 파트너는 “현재 작업 중인 물건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라도 반드시 빼내 오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후 A씨가 단둥 등에서 대북 사업을 하는 다른 이들에게 연락한 결과 이들은 모두 북한에서 받아야 할 물품을 하루라도 빨리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현재 나선경제특구, 평양, 남포 등 북한 내부 도시와 단둥, 훈춘 등의 북·중 접경지역에서는 주로 의류봉제업을 중심으로 두 나라 간 무역이 활발하다. 북한과 계약을 맺은 업체는 대부분 중국 법인이다. 중국 토종업체도 있지만 한국이나 미국, 일본 등 제3국 회사와 합자하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 형식적으로는 중국 법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제3국 업체가 운영하는 일이 많다.
이 같은 의류봉제업은 통상 임가공 형태로 진행된다. 임금이 저렴한 다른 나라 업체에 원자재를 제공해 생산을 위임하는 형태로, 이렇게 만들어진 제품은 의뢰업체가 다시 들여오거나 제3국에 수출한다. 임가공 의뢰 업체 처지에선 자국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싸고 우수한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북한 처지에선 임가공료를 통해 외화벌이가 가능해지는 것과 함께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다. 이렇게 벌어들일 수 있는 달러가 막대하기 때문에 북한은 전역에서 임가공 산업을 장려하고 있다.
앞서 평양이 내렸다는 지시는 이러한 임가공 무역 가운데 남한과 손잡고 진행하는 사업에 대한 금지 조치다. 북측 파트너는 물론, 중국과 한국 측 사업 파트너 모두 난리가 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상이 걸린 건 의류봉제업만이 아니다. 북한 당국의 이번 조치로 수산물가공업체들도 비상이 걸렸다고 A씨의 북측 파트너는 전했다. 이들 업체는 주로 오징어나 동태, 가리비 등을 가공해 한국이나 중국에 수출해왔는데, 역시나 한국 회사와 사업을 진행하는 일이 금지됐다는 것이다.
평양의 이러한 조치는 북한 경제에도 적잖은 타격을 줄 공산이 크다. 나선경제특구 상황에 정통한 A씨는 의류봉제업과 수산물가공업 의존도가 높은 나선경제특구의 경우 이 지시를 그대로 따르면 치명타가 불 보듯 하다고 말했다. 현재 나선경제특구에는 의류봉제업에 2만 명, 수산물가공업에 3000명 정도의 인력이 일하고 있다는 것. 나선경제특구에서 생산하는 의류 가운데 60%가 한국으로 수출되고 나머지 30%와 10%는 각각 일본과 중국 내수용으로 수출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수산물가공물의 경우 한국행 비중이 더욱 커서 70%에 이르고 나머지만 일본으로 수출된다고 한다. 단순 계산으로 따져도 나선경제특구에서만 의류봉제업 종사자의 60%, 수산물가공업 종사자의 70%가 이번 조치로 당장 생계에 타격을 입게 되는 셈이다,
다른 서방국가까지 확대?
평양이 이처럼 자해에 가까운 선택을 내린 이유와 관련해 2003년 탈북한 김영희 KDB산업은행 북한경제팀장은 “북한 경제는 임가공 의존도가 매우 높으므로 평양이 정말로 이런 선택을 했다면 제 무덤을 파는 일”이라면서 “앞으로 당분간 남한과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분석했다. 국제사회의 여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태도를 과시함으로써 남한과 단절되더라도 자신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앞으로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겠다는 자신감을 보여주려는 행보라는 풀이다. 김 팀장은 “남한 정부와 기업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기 위한 포석도 엿보인다”고 덧붙였다.
조봉현 IBK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한국 정부와 국제사회가 강력한 대북제재를 추진하는 것에 대응해 북한이 선수를 쳐서 맞불 작전을 펼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한다. 제재 국면에서 내부 주민들을 다잡으려는 조치의 일환으로 남한과의 접촉을 철저히 통제하겠다는 목적도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평양이 남한과의 간접거래를 전면 금지한다 해도 북한 기업들이 이를 고스란히 따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한번 ‘돈맛’을 본 사람들이 그 맛을 쉽게 포기할 리 만무하다는 것. 북한 당국은 외화를 개인적으로 축적하지 말라고 지시하고 있지만, 대다수 관료가 다양한 방식으로 달러를 착복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실제로 앞서 본 대북사업가 A씨는 평양의 다른 경로를 통해 북한과의 사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지시와는 별개로 ‘뒷구멍’은 있기 마련이고, 북한 역시 돈만 주면 뭐든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것 가운데 하나는 2월 하순의 외신 보도다. 호주 ‘선헤럴드’와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중국 업체의 북한 위탁 생산을 비판하는 보도를 잇달아 내놨다. ‘호주 유명업체가 중국 업체에 위탁한 제품이 실은 평양 근교에서 생산한 것으로 확인됐다. 중국 기업이 북한 공장에서 제품을 만든 것은 북한 정권을 지원하고 그들의 인권 유린을 사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내용의 보도였다. 이른바 ‘노예 노동’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여 김정은 정권을 유지하는 자금줄로 활용한다는 비판이다.
현재 세계 유수 기업들은 이 호주 업체와 마찬가지로 중국 업체를 중간에 두고 북한과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남한 기업과의 공동사업 금지 조치가 서방국가 전반으로 확대될 경우 이들 기업의 활동은 또 어떻게 될까. 겁 없는 30대 젊은이 김정은 정권의 독주에 맞서 국제사회가 더욱 고삐를 죄면서, 북한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수준의 고립 상황을 맞이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