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식민지 인도에 추월당한 영국 경제… 수낵 총리, 캐머런 기용 및 감세 승부수

영국 보수당은 1997년 이후 연달아 3차례 총선에서 패배하자 2005년 당시 39세인 하원의원 데이비드 캐머런을 대표로 내세웠다. 캐머런 대표는 2010년 총선에서 승리를 이뤄냈다. 영국 역사상 200년 만에 가장 젊은 총리가 된 캐머런 총리는 온정적인 보수주의를 강조하면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배려·분배 확대 정책을 추진했다. 6년간 정부를 이끌던 캐머런 총리는 영국의 유럽연합(EU) 잔류파였지만 2016년 6월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EU 탈퇴) 국민투표에서 패하자 책임을 지고 같은 해 7월 사임했다.

이후 정계에서 은퇴한 캐머런 전 총리가 11월 13일(현지 시간) 외무장관으로 전격 발탁돼 복귀했다. 전직 총리가 장관으로 내각에 복귀한 것은 1964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알렉산더 더글러스흄이 1970년 에드워드 히스 내각 외무장관으로 임명된 이후 53년 만이다. 리시 수낵 총리가 캐머런 전 총리를 외무장관으로 기용한 것은 일종의 ‘승부수’라고 볼 수 있다.

보수당 통합과 브렉시트 해결 열쇠

외무장관으로 내각에 깜짝 복귀한 데이비드 캐머런 전 영국 총리. 11월 13일(현지 시간) 총리 관저에서 나와 외무부로 이동하고 있다. [영국 정부]

보수당은 2016년 브렉시트 이후 당대표와 총리가 5명이나 바뀌면서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왔을 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극우 강경파가 득세했다. 또한 야당인 노동당에 지지율이 뒤집힌 데 이어 격차가 갈수록 커졌다. 이에 수낵 총리가 보수당의 단결과 통합을 위해 온건 중도파를 대표하는 캐머런 전 총리를 끌어들인 것이다. 실제로 수낵 총리는 캐머런 전 총리를 외무장관으로 기용하면서 극우 강경파인 수엘라 브래버먼 내무장관을 해임하고 제임스 클레벌리 외무장관을 새 내무장관으로 임명했다. 브레버먼 전 내무장관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관련해 가자지구 주민들에 대한 지원 등을 호소하는 친(親)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는 등 극우 강경파의 입장을 보였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차기 총선 승리와 브렉시트 이후 분열된 보수당 통합을 위해 수낵 총리가 캐머런 전 총리를 기용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수낵 총리는 보수당 의원과 당원들에게 “통합이 아니면 죽음”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수낵 총리가 캐머런 전 총리를 발탁한 또 다른 목적은 브렉시트를 후회하는 국민 여론을 반영하기 위함이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58%가 영국의 EU 재가입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친EU 성향을 보이는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는 “차기 총선에서 승리하면 EU와 더 나은 브렉시트 협상을 모색할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수낵 총리는 캐머런 장관을 앞세워 EU와 관계를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최근 EU에선 핵심 회원국과 주요 비회원국을 묶어 유럽정치공동체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온다. 이는 영국을 염두에 둔 것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지정학적 갈등으로 EU와 영국의 협력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영국으로선 EU의 핵심인 독일, 프랑스와 관계 강화가 중요한 만큼 수낵 총리는 이를 조율하는 데 가장 적합한 인물로 캐머런 전 총리를 선택한 것이다. 게다가 브렉시트 문제는 내년 총선에서 가장 뜨거운 현안이 될 수 있다.

식민지였던 印에 세계 5위 경제대국 자리 내줘

리시 수낵 영국 총리(오른쪽)가 11월 13일 총리 관저에서 데이비드 캐머런 외무장관과 대화하고 있다. [영국 정부]

이처럼 보수당의 통합과 브렉시트 문제를 겨냥해 승부수를 던진 수낵 총리는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 경제 살리기 총력전에도 나섰다. 영국 경제는 브렉시트 이후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영국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인도에 밀려 세계 6위로 내려앉았다. 영국이 과거 식민지였던 인도에 세계 5위 경제대국 자리를 내줬다는 것은 치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영국의 올해 GDP 성장률을 -0.6%로 예상했는데, 이는 주요 7개국(G7) 국가 중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것이라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영국이 ‘잃어버린 10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경고까지 나온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은 영국 경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더욱 나빠지고 있다. 에너지 가격이 치솟아 전기요금과 난방비 등이 크게 올랐고, 식료품 가격 상승 등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급등했다. 또 높은 실업률, 경기침체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영국 경제성장률이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EU 최저 수준인 0%대를 기록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수낵 총리가 내민 카드는 사상 최대 규모 법인세 감면이다. 영국 정부는 11월 22일 연간 150억 파운드(약 24조5800억 원) 규모의 법인세 감면을 골자로 한 경기부양 패키지를 내놨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기업 대상 감세 조치다. 영국 정부가 발표한 예산안에 따르면 기업이 정보기술(IT) 장비와 생산설비에 투자한 금액의 25%를 법인세에서 공제해준다. 영국 기업들은 연간 최대 110억 파운드(약 18조 원)의 법인세 부담이 경감될 것으로 보인다.

특별 세액공제는 당초 2026년 만료되는 한시적 조치였으나 이를 영구 제도화했다. 숙박·소매·레저 업종 기업에 한시적으로 적용해온 법인세 75% 인하 조치도 5년간 연장하기로 했다. 이 조치로 중소기업들은 43억 파운드(약 7조 원) 규모의 감세 혜택을 볼 것으로 예상된다. 또 제조업 분야 투자를 촉진하고자 2030년까지 자동차·우주항공·생명공학·신재생에너지 산업 등에 45억 파운드(약 7조3700억 원)의 인센티브를 주기로 했다. 정부 차원에서 인공지능(AI) 산업 육성을 위해 관련 인프라 조성에 5억 파운드(약 8200억 원)를 별도로 투자하기로 했다. 연구개발(R&D) 세액공제를 위한 절차도 간소화한다.

내년 총선에 앞서 경제 살리기 총력전

영국 하원의원들에게 자신의 정책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수낵 총리. [영국 의회]

영국 정부는 이번 감세 카드로 연간 경제성장률을 1%p 이상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제러미 헌트 재무장관은 “기업 투자가 증가하고 더 많은 사람이 일하게 되면서 내년에는 인플레이션이 둔화하고 경제가 성장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영국 언론들은 “수낵 총리와 보수당 정부가 내년 총선을 앞두고 법인세 감세 카드로 승부수를 던졌다”며 “경제를 살리지 않고선 선거에서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국 정부는 이와 함께 국민보험(NIC·영국 사회보험) 요율도 현행보다 2%p 낮춰 10%로 인하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개인 부담을 줄여 소비 지출을 늘리려는 것이다. 또 현재 시간당 10.42파운드(약 1만7000원)인 최저임금은 내년 4월부터 11.44파운드(약 1만8700원)로 인상된다. 영국 정부는 감세로 부족해지는 재원은 불필요한 정부 지출을 최소화하고 국채를 발행해 마련하기로 했다. 향후 10년간 공공지출 증가율을 연 1% 이하로 제한하고, 공무원은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줄이기로 했다.

수낵 총리는 또 기후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환경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정책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북해의 신규 석유·가스 개발 사업 승인이 대표적이다. 영국 북해 유전 규제기관인 북해전환청(NSTA)은 로즈뱅크 유전 개발을 승인했다. 노르웨이 석유생산업체 에퀴노르와 이스라엘 이타카에너지가 8 대 2 비율로 38억 달러(약 4조9000억 원)를 투자한다. 스코틀랜드 북부 셰틀랜드섬 서쪽에 위치한 로즈뱅크 유전은 3억 배럴의 원유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길라드 마이어슨 이타카에너지 회장은 “이곳은 영국에서 가장 큰 미개발 유전”이라고 밝혔다.

북해 유전 신규 승인, 친환경 정책 속도 조절

북해 해저 유전에서 원유를 채굴하기 위해 설치한 오일 플랫폼. [그린피스]

영국 정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공급이 불안정해진 만큼 국가 안보를 위해 북해 유전 개발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영국의 지난해 에너지 수입 의존도는 37%다. 에너지원별로는 가스 38.4%, 풍력 24.6%, 원자력 14.6%, 바이오에너지 10.9%, 태양열 4.3%, 석탄 1.7% 등이다. 수낵 총리는 “북해 석유·가스 사업권 100여 건을 승인할 계획이며 앞으로 수백 건을 더 내줄 수 있다”고 밝혔다. 반면 노동당은 집권하면 북해의 신규 유전·가스전 개발 허가를 내주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기후변화는 보수당과 노동당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다.

수낵 총리는 이와 함께 휘발유 등 신규 내연기관 자동차의 판매 금지 시기를 2030년에서 2035년으로 늦추기로 했다. 수낵 총리는 “2050년까지 탄소배출량 제로를 달성하겠다는 목표에 전념하고 있지만 영국이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앞서 있기 때문에 더 느리게 진전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또 탄소중립 전환에 따른 영국 가계의 부담을 줄일 방안도 추진한다. 수낵 총리는 “가스가 필요 없는 히트펌프 보일러 전환 속도를 늦추고 가정의 단열 개선도 강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히트펌프는 자연열원(태양열, 지열, 수열, 공기열 등)을 실내로 끌어들여 난방에 사용하는 방식이다. 영국 언론들은 “수낵 총리가 일부 친환경 정책을 축소하면 높은 물가상승률과 경제침체로 어려움을 겪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낵 총리의 잇따른 승부수가 내년 총선에서 보수당 승리라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