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반도체 파운드리업체 대만 TSMC가 최근 일본 공장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TSMC]
일본 집권 여당 자유민주당(자민당)이 5월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추진 의원 연맹’을 설치했을 때 회장을 맡은 아마리 아키라 의원이 강조한 대목이다. 당시 이 조직의 고문직은 아베 신조 전 총리와 아소 다로 전 부총리가 맡았다. 아마리 의원은 기시다 후미오 의원이 10월 4일 일본 100대 총리로 선출된 이후 실시한 당정 개편에서 자민당 2인자인 간사장에 임명됐다. ‘뉴스위크’ 일본판은 일본 정부의 정책 향방을 좌우하는 가장 큰 인사로 아마리 간사장을 지목하면서 일본 대내외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TSMC 공장 건설비용 절반 지원하는 日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운데)와 아마리 아키라 자유민주당 간사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등은 반도체산업 강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 총리실]
세계 1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업체 대만 TSMC는 기시다 총리 내각이 출범한 지 10일 만에 일본에 반도체 공장 신설 계획을 발표해 세계 반도체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웨이저자 TSMC 최고경영자(CEO)는 10월 14일 실적 발표회에서 22~28㎚(나노미터) 공정이 적용된 반도체 생산 공장을 2022년 일본에 건설해 2024년부터 가동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TSMC의 일본 반도체 공장은 구마모토현 기쿠요초에 위치한 소니그룹 반도체 공장 인근에 건설될 것으로 보인다. 22~28㎚ 공정은 최첨단은 아니지만 이미지센서와 마이크로 컨트롤러 유닛(MCU) 등 차량용 반도체를 제작할 수 있다. 소니도 TSMC의 반도체 공장에 출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일본 자동차 부품업체 1위 덴소도 차량용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조달하기 위해 TSMC 반도체 공장에 전용 설비를 두는 형태로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반도체는 소니그룹과 도요타 등 일본 자동차회사들에 우선 공급될 예정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TSMC의 일본 공장 건설비용 8000억~1조 엔(약 8조~10조 원) 가운데 절반을 일본 정부가 지원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외국 기업에 대규모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은 사상 처음이다. TSMC는 민간기업이지만 대만 정부가 지분 7%를 보유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일본과 대만 정부가 물밑에서 적극 협력하기로 약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시다 총리와 아마리 간사장 등은 그동안 TSMC와 협력을 주장해왔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기시다 총리가 반도체 공급망 안정을 비롯한 경제안보를 주요 전략으로 내세운 가운데 양국 협력이 나왔다고 지적했다. 기시다 총리는 “TSMC 공장 건설은 일본 반도체산업의 자율성을 높이고 경제안보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유사시 일본 자위대 지원 기대하는 대만
TSMC가 건설할 일본 반도체 공장 인근에 위치한 소니그룹 공장. [Nikkan]
일본 정계에서는 대만과 군사협력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아소 전 부총리는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일본이 집단 자위권을 발동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집단 자위권은 동맹국이 공격받았을 때 이를 자국에 대한 침략 행위로 보고 반격할 수 있는 권리다. 아소 전 부총리는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점령하면 일본도 존립 위기를 맞이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면서 “일본이 미국과 함께 대만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마리 간사장과 아베 전 총리의 동생인 기시 노부오 방위상도 이런 주장에 적극 동조해왔다. 이런 점 때문에 대만 정부 처지에서는 일본 정부가 적극 추진하는 반도체산업 강화에 도움을 줌으로써 유사시 일본 자위대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경제적으로 볼 때 TSMC를 비롯한 대만 반도체업체들은 일본 기업의 반도체 제조 장비와 부품, 소재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는 이점을 갖는다. 현재 반도체업체들은 글로벌 공급망이 자칫 붕괴될 경우에 대비해 장비와 부품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본 반도체 제조 장비와 부품, 소재는 세계적 수준이다. 실제로 TSMC는 그동안 일본 기업들과 활발하게 협력해왔다. 도쿄 일렉트론, 신에츠화학, JSR, 스크린 세미콘 닥터 솔루션, 섬코 같은 일본 기업이 모두 TSMC의 주요 부품과 장비 공급업체들이다
더욱이 대만 국민은 대부분 과거 식민지배를 했던 일본에 반감을 보이지 않는다. 대만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이후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미국 등 연합국에 항복할 때까지 50년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만 국민은 일본이 식민 통치 기간 근대화 토대를 닦아줬다며 호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그동안 대만 기업들이 일본 기업들과 밀월관계를 맺어올 수 있었던 이유다.
日 반도체 동맹으로 ‘과거 영광’ 재연 목표
일본 정부가 대만과 반도체 동맹을 맺은 의도는 ‘과거 영광’을 재연해보려는 것이다. NEC, 도시바, 히타치 등 일본 반도체업체들은 1980년대 후반 세계시장의 50%를 차지하는 등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현재는 세계시장 점유율이 10%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최근 보고서에서 “반도체산업을 적극 육성하지 않을 경우 2030년 글로벌 반도체시장에서 일본의 시장점유율이 제로(0)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실제로 일본에는 아예 최첨단 반도체 공장조차 없다. 일본 정부는 올해 들어 민관이 참여하는 공동 사업체를 신설하고 경제안보 차원에서 첨단 반도체 제조기술의 공동개발과 생산 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또한 일본 정부는 TSMC 등 외국 반도체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해 적극 나서왔다. 외국 기업들을 유치해 자국에 제조 거점을 확보해야 반도체 공급이 중단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들의 기술과 생산 노하우를 확보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기우다 고이치 일본 경제산업상은 “반도체는 국가 산업을 지탱하는 쌀”이라면서 “외국산에 의존하지 않고 국내 제품을 만들 수 없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조 기반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일본 정부의 의도는 경쟁력이 있는 반도체 제조 장비 및 부품, 소재 분야와 TSMC의 협력을 통해 세계 반도체시장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일본 경제산업성은 5월 TSMC가 일본 반도체 장비 제조 및 부품업체들과 협력해 첨단 반도체를 연구개발(R&D)하는 프로젝트에 전체 사업비 370억 엔(약 3790억 원)의 절반인 190억 엔(약 1946억 원)을 보조하기로 했다. TSMC는 3월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에 TSMC 재팬 3DIC(3차원 집적회로) R&D센터를 설립했다. TSMC가 R&D센터를 만든 이유는 ‘후(後)공정(패키징)’ 분야에서 일본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다. 반도체 제조 공정은 디스크형 실리콘 웨이퍼에 회로가 형성되는 ‘선(先)공정’, 많은 수의 사각형 칩이 웨이퍼에서 절단돼 기판과 배선으로 연결되는 후공정으로 나뉘어 있다. 후공정은 최근 스마트폰을 비롯한 IT(정보기술) 기기의 크기가 작아지고 공정이 계속 미세화하면서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분야다. 이비덴 등 일본 반도체 제조 장비와 부품, 소재업체들은 후공정에 상당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일본과 대만의 반도체 동맹은 앞으로 강화될 것이며,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시장에서 TSMC와 삼성전자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