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문재인 대통령,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 윤석열 전 검찰총장. [동아DB]
10월 15일 한 누리꾼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저서 ‘조국의 시간’을 불태운 사진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더불어민주당(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종료와 함께 조 전 장관이 “자신이 반대했던 후보에 대한 조롱, 욕설, 비방 글을 내리자”는 제안을 한 직후였다.
“대통령도 문파에서 제명될 수 있다”
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의 극성 지지자이자 이재명 대선후보를 극렬하게 반대한 이들은 잇따라 서적 훼손 사진을 올리며 조 전 장관을 성토했다. “변호사비 도움 되라고 책도 50권 샀단다. 나눠주고 남아 있는 것 다 찢어버린단다.” “조국의 시간은 여기에서 멈췄다.” ‘조국 반대’에 선 진보 진영 인사들에게 쏟아졌던 비난 이상의 독설과 저주다.이는 이낙연 지지층만의 일이 아니다. 민주당 송영길 대표는 극성 이낙연 지지자들을 “거의 일베(일베저장소) 수준”이라고 비난했다 논란이 되자 사과했다. 이재명 후보 극성 지지자들 중에는 ‘일베’ 뺨치는 경우가 없는가. 그들은 이번 경선 기간 이낙연 전 대표에게 ‘수박’이라는 공세를 퍼부었다. 겉은 민주당 로고 색처럼 푸르지만 속은 국민의힘 로고 색처럼 붉다는 뜻이다. 당원 사이에서 오갈 수 있는 단어로는 ‘욕설만 아닐 뿐 극언’이다.
이 후보가 경기관광공사 사장직에 내정했지만 후보직을 자진 사퇴한 맛칼럼니스트 황교익 씨는 그들을 ‘극렬 문빠’라고 칭했다. 이 전 대표 극성 지지층은 ‘문파’ ‘문꿀오소리’ ‘강성 친문’으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극렬 문빠’는 이재명 지지층에도 많다. 민주당의 이름난 논객 다수가 이재명 편에 섰고 국민의힘뿐 아니라 이 전 대표까지 거세게 공격했다. 여기서 ‘문빠’가 아닌 자 몇이나 되나.
그럼 문재인 대통령이라고 해서 ‘문빠 내전’을 종식할 수 있을까. 이낙연 지지자이자 이재명 비토자인 한 누리꾼은 이런 글까지 올렸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문재인 대통령님이 이재명을 도와주는 순간 대통령님도 문파에서 제명당할 수 있다는 걸 자각해야 한다.” ‘문파’도 ‘문(文)’을 파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빠 현상’ 본질, 개인숭배 아냐
이재명 경기도지사(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더불어민주당 20대 대선후보 선출 직후인 10월 1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SK올림픽핸드볼경기장 밖에서 지지자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뉴스1]
흔히 ‘팬덤’ ‘~빠’로 불리는 현상의 본질은 개인숭배가 아니다. 박근혜와 문재인 두 전현직 대통령을 비교해보자. 둘은 각각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두 전임자(박정희와 노무현)의 후광을 입었으나, 곧바로 유산을 상속받은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02년 한때 한나라당을 탈당해 독자노선을 걸었지만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문 대통령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이후 대선주자로 뜨는 데 2년 남짓한 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카리스마로 지지층을 집결한 게 아니라, 이미 결집된 지지 열기 위에 올라탔다. 어느 누구 하나 리더십을 구축하지 못한 국면에서 ‘박정희의 딸’이라는 것보다, ‘노무현의 친구’라는 것보다 확실한 보증은 없었다. 이들의 내리막도 이를 증명한다. 최순실 게이트로 박근혜 정권은 힘없이 무너졌다. 미래권력에 대한 지지나 비토는 ‘문재인 단일 대오’를 흐트러뜨렸다. 박근혜와 문재인은 숭배 대상이 아니라 마스코트에 지나지 않았다.
환호와 도취보다 증오와 원한이 먼저였다. 리더 출현 이전에 군중은 이미 모여 있었다. ‘박정희가 일으킨 나라를 김대중·노무현에게 넘겨줬다’는 치욕은 ‘나라를 팔아먹어도 박근혜’로 표출됐고, ‘한국사 최초의 개혁정부가 무너져 노무현을 지키지 못했다’는 절망이 ‘대××가 깨져도 문재인’으로 발산됐다. 적개심은 쉽게 리더를 세우는 한편, 리더의 단점을 못 보게 한다. 적을 제압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렇듯 강해지는 이분법은 ‘50 대 50’으로 끝나지 않는다. “왜 우리 쪽 50은 저쪽 50을 이기지 못하는가”라는 울분은 “우리 쪽 50 내부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으로 이어진다. ‘우리 쪽 50’에 ‘불순하게 섞인 25’를 물리치고, ‘진정한 우리 편 25’ 중 ‘타락한 12.5’를 솎아내는 것으로 점철되는 것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가운데)이 10월 4일 부산 동래부 동헌 외대문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윤석열 캠프]
“왜 우리는 저들을 못 이기지?”
‘대깨문’은 그 길을 그대로 걸어갔다. 박근혜 탄핵에 함께한 다른 당들과 그 후보들을 지난 대선 기간 적으로 취급하고 자유한국당보다 더 미워했다. 진보적 사회단체나 언론이 정권에 이런저런 주문 또는 비판을 하면 곧바로 “새누리당 정권 9년 동안 뭐 하고”라고 야유했다. 어떤 민주당원보다 가열 차게 반정권 투쟁을 벌인 그들의 역사를 왜곡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진보 및 중도층 내 비판자들을 국민의힘과 같은 편으로 몰았다. 그 귀결이 전직 당대표까지 ‘수박’이라고 찍어 공격하는 오늘이다.‘대깨’ 현상은 민주당 쪽만의 일이 아니다. 요즘 윤석열 전 검찰총장 지지층은 10년 전 ‘문빠’나 ‘나는 꼼수다’와 크게 닮았다. 극성 지지층 사이에선 “정권의 악에 대항해야 한다”가 다른 모든 논의를 압도한다. ‘고발 사주 의혹’에 대한 단서를 공개한 제보자나 언론을 문재인 정권과 한패거리로 취급하기도 한다. ‘우리는 정권에 핍박받는 약자’라는 자의식이 성찰을 무너뜨린 것이다. 온라인에서는 이미 ‘대깨윤’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다.
‘대깨윤’과 내전을 치르는 국민의힘 홍준표 의원의 열성 지지층 ‘무야홍’은 다른가. 양측 갈등은 ‘명낙대전’의 궤도를 따라가고 있다. 윤 전 총장이 최고책임자였던 ‘조국 수사’를 두고 홍 의원이 ‘전 가족 도륙’ ‘과잉 수사’라고 평가하자, 일부 지지자는 이에 동의하기까지 했다. 올가을 각각 ‘조국수홍’ 논란에 빠진 이들과 ‘조국의 시간’을 불사른 이들은 2년 전엔 각각 ‘조로남불’에 분개했으며 ‘조국수호’를 부르짖었다. 거듭된 내전과 돌고 도는 분노가 ‘주요 타격 방향’까지 바꾸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