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적을 앞둔 레드불 잘츠부르크의 황희찬.
또 한 명의 대한민국 빅리거 탄생이라. 과거 박지성이 순도 높은 골로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무대를 뒤흔들곤 했지만, 정통 스코어러 임무를 맡은 건 아니었다. 골잡이 영역에서 보면 어쩌면 손흥민이 쥐고 있는 그 바통을 황희찬이 함께 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있다.
황희찬이 유럽 땅에 출사표를 던진 건 2015년 1월이다. 포항스틸러스 U-18 포항제철고 졸업과 동시에 장거리 비행길에 올랐다. 행선지 오스트리아는 ‘미지의 땅’ 느낌이 강했다. 과거 서정원 전 감독 등이 선수로 활약하긴 했으나, 국내 축구팬에게 그리 친숙한 곳은 아니었다. 더욱이 처음부터 이 선수의 성공 가도를 내다본 이가 얼마나 됐을까. 국내 고교 초특급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어도, 유럽은 또 다른 얘기였다. 5년 전 잘츠부르크 첫 계약 당시 수줍게 웃던 앳된 소년 앞엔 너무도 고된 싸움이 남아 있었다.
EPL에서는 에버턴이 유력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 동료와 서로 걷어차면서 싸운 적도 있다.” 잘츠부르크 현지에서 만난 황희찬이 과거 에피소드를 꺼내 놓았다. 그런 척박한 토양에서 만 5년 넘도록 분투했고, 생존을 통해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 보였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팀의 2군에서 시작해 1군 주축이 됐으며, 매년 우승 트로피를 선사하는 등 팀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 4강행 합작, 챔피언스리그 리버풀전 강렬한 득점, 그리고 월드컵과 올림픽, 아시아경기까지. 이제는 더 큰 꿈을 현실로 탐할 때도 됐다 싶다. 때로는 롤러코스터를 타면서까지 축구선수로 성장할 자양분을 빨아들였다.유럽 현지 매체들이 거론한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 잉글리시프리미어리그(EPL)와 독일 분데스리가다. 먼저 EPL은 비교적 최근까지 에버턴 FC행 얘기가 흘러나왔다. 지난겨울 울버햄프턴 원더러스가 꾸준히 언급된 데 이어, 또 다른 클럽이 등장한 것이다. 황희찬 본인도 잉글랜드를 우선순위로 삼았던 것을 떠올리면 개인적 동기 차원에서 흡족할 만했다.
에버턴은 황희찬에게 크나큰 도전이 될 수 있다. 일단 팀 규모부터가 생각보다 상당하다. 박지성, 이영표, 박주영, 손흥민 등 종전 선배들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널 FC, 토트넘 홋스퍼 같은 팀에서 뛰어서 그렇지, 에버턴도 절대 작은 클럽이 아니다. 2019-2020시즌 순위는 12위로 처져 있지만, 그 위 팀들과 승점 차가 그리 크지 않다. 빡빡하기로 소문난 EPL에서 중상위권을 유지해온 잔뼈 굵은 구단이다.
‘팀에서 선수를 얼마나 원하느냐’, 즉 ‘경기당 몇 분 정도 출전할 수 있느냐’ 차원에서 고민할 일이다. 황희찬의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들에 따르면 명장으로 꼽히는 카를로 안첼로티 에버턴 감독도 오랫동안 이 선수를 지켜봐왔다. 다만 황희찬과 또래인 히샬리송이나 도미닉 칼버트르윈 등 기존 자원들과의 경쟁을 고려해야 한다. 도전자 입장에서 깨야 할 벽을 간과할 순 없다. 물론 이런 틈바구니에서 살아만 남는다면 빅클럽행은 한결 수월할 테다. 세계적으로 이목이 쏠리는 EPL의 노출도라면 메리트가 어마어마하다.
리그만 따지면, EPL이 더 매력적
그 후 떠오른 게 독일 RB 라이프치히다. 그간 잘츠부르크에서 라이프치히로 넘어간 선수가 한둘이 아니었던 만큼 황희찬의 독일행을 막연하게나마 그리는 이도 적잖았다. 그런데 이달 들어 이 예측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독일 ‘빌트’ ‘키커’ 등 현지 유력 매체들이 황희찬과 라이프치히를 엮으면서부터다. 이들은 어느 정도 신중한 면이 있는 매체들로, 그간 쌓아온 신뢰도가 꽤 된다. “그 보도들이 실제 선수 사정과도 근접하다”는 제보도 뒤따랐다.황희찬이 라이프치히로 갈 것이라고 유추할 만한 단서는 꽤 많다. 일단 라이프치히의 골잡이 티모 베르너가 이적했다. EPL 소속 첼시 FC는 최근 “라이프치히의 베르너와 5년 계약을 맺었다”고 공표했다. 원 구단으로선 핵심 자원이 빠진 자리를 하루빨리 메워야 한다. 율리안 나겔스만 라이프치히 감독이 황희찬의 존재를 잘 아는 만큼 이 선수 역시 영입 후보군에 있으리라는 합리적 추론이 나온다.
감독이 원해서, 선수가 원해서라는 이유만으로 덜컥 거래가 성사되진 않는다. 축구에서 ‘이적’은 이적료를 다룰 양 구단 간, 그리고 금전적 조건 및 계약 기간 등을 맞출 구단과 선수 간 여러 합의가 맞아떨어져야 하는 이른바 종합예술이다. 황희찬의 사례처럼 기존 구단이 아직 선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면 ‘A팀-선수-B팀’ 모두가 충족할 협상 과정이 필수다. 서로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는 복잡한 수 싸움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분데스리가행 전망이 밝은 편이다. 잘츠부르크와 라이프치히는 에너지 드링크 업체 ‘레드불’을 통해 태어났다. 모기업을 클럽 이름에 전체적으로 노출할 수 없다는 규정에 의거, 라이프치히가 ‘Red Bull’ 대신 약자만 같은 ‘RasenBall Sport’를 사용하고 있지만 두 팀 모두 레드불을 뿌리로 하고 있다. 라이프치히 홈구장 이름도 ‘레드불 아레나’다. 모태가 같은 팀인 만큼 선수 이적의 매듭을 풀어가기도 쉬웠다. 실제로 나비 케이타, 다요 우파메카노 등 적잖은 잘츠부르크 출신이 라이프치히에서 만개했다.
리그 전반의 경쟁력이라면 EPL이 분데스리가보다 매력적이긴 하다. 다만 최근 몇 년간 바이에른 뮌헨,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등과 최상위권에서 경쟁해온 라이프치히라면 황희찬의 커리어에 ‘분데스리가 우승’을 새겨 넣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함부르크 SV, 바이엘 04 레버쿠젠을 거친 손흥민에게도 없는 대업적이다.
황희찬, 세계적 선수로 도약할 준비
또 라이프치히는 매년 챔피언스리그에 출전 중이다. 정규리그나 유로파리그에 만족해야 할 에버턴과 달리, 이곳에서라면 ‘별들의 전쟁’을 좀 더 많이 경험할 수 있다. 황희찬 본인도 챔피언스리그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잘 알고 있다. 몸값 폭등의 실경험자이기도 하지 않나. 황희찬의 빅리그 이적설이 연이어 터져 나온 것도 지난해 10월 리버풀 수비수 버질 판 다이크를 제친 뒤 골문을 연 다음이었다.지금까지 큰 그림을 그리며 준비해온 황희찬이다. 사석에서는 “훗날 잉글랜드나 스페인에서 뛰고 싶다”는 바람을 밝히기도 했다. 지금 당장 유럽에서 손꼽히는 대형 클럽으로 가면 좋겠지만, 병역이 해결된 20대 중반 선수에겐 확실한 디딤돌이 우선이다. 오스트리아에서만 누빈 지난 5년과 달리, 새로운 리그 흐름에 익숙해진다면 향후 빅클럽 적응도 한결 수월할 테다.
새로운 팀과 관련된 공식 발표도 머지않은 듯하다. 황희찬을 가까이에서 지켜봐온 이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5년 전 오스트리아에 갈 때 ‘진짜 시작이구나’ 싶었는데, 지금도 ‘또다시 시작이구나'’라는 느낌이다. 매 순간이 도전이고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본디 황희찬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늘 무언가를 쟁취하며 이뤄왔으니, 이제는 또 다른 출발선에 선 이 공격수의 꿈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