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엘 갤러거 하이 플라잉 버즈 내한공연. [사진 제공 · 라이브네이션코리아]
1990년대를 대표하는 영국 밴드 오아시스의 리더였던 노엘 갤러거는 한국을 여러 차례 찾았다. 오아시스 시절인 2006년 첫 내한을 시작으로 총 3회, 오아시스 해체 후 하이 플라잉 버즈를 결성한 이래 총 다섯 번 내한공연을 가졌다.
1967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53세, 중년도 꽉 찬 중년의 나이다. 보통 그 연배의 뮤지션이 내한을 하면 객석에도 19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이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노엘 갤러거는 ‘그때 그 사람’ 정도의 취급을 받는 인물이 아니다.
한국 젊은층 사랑받는 1990년대 악동
노엘(왼쪽)과 리엄 갤러거 형제. [IMDb]
갤러거 형제는 1990년대 영국 음악 매거진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들이었다. 단순히 음악적인 인기 때문이 아니라, 거칠지만 센스 넘치는 입담 덕분이었다. 한국 연예인으로 치면 김구라 캐릭터에 재미를 훨씬 많이 더한 느낌이랄까. 독설과 조크를 적절히 활용하는 그의 어록은 ‘짤방’으로 재생산되며 누리꾼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노엘 갤러거의 팬층이 젊게 유지될 수 있는 한 이유다.
5월 20일도 그랬다. 공연이 오후 8시, 입장 시작이 7시였지만 5시 반부터 꽤 많은 관객이 공연장 주변을 기웃거렸다. 티셔츠와 포스터 등 머천다이즈 상품도 거의 다 팔렸다. 관객 대부분이 20대, 많아봐야 30대 초반인 듯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40대 이상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마 그의 팬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평균 연령대일 것이다.
정규 앨범에는 담긴 적 없이 싱글로만 발매돼 아직도 많은 오아시스 팬의 수집 대상인 ‘Whatever’를 부른 다음 그는 혼자 기타로 익숙한 코드를 쳤다. 노래는 하지 않았다. 오아시스 데뷔 앨범의 대표곡이자 1990년대 가장 아름다운 노래 가운데 하나인 ‘Live Forever’.
한국 관객은 이 노래를 정말 사랑한다. 오아시스 시절을 포함해 노엘 갤러거가 이 노래를 공연 때마다 불렀던 건 아니다. 만약 그가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면 관객들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 노래를 떼창하며 제발 ‘Live Forever’를 불러달라는, 일종의 시위를 펼치기도 했다. 어느 공연에서였던가, 결국 감동한 노엘 갤러거가 예정에 없던 이 노래를 불렀다. 이번에도 비슷했다. 한국에 오기 전 가졌던 일본 공연에서는 ‘Live Forever’를 연주하지 않았지만, 한국 공연에선 노래는 관객에게 맡기고 자신은 연주를 선보여 짧지만 아름다운 순간을 펼쳤다. 꾸준히 한국을 찾는 아티스트와 그때마다 모든 티켓을 매진시키는 팬들이 만들 수 있는 음악의 시간이었다.
축구장이 가장 행복한 축구팬의 공연
2016년 8월 16일 헝가리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는 노엘 겔러거. [위키피디아]
어쨌든 노엘 갤러거의 맨시티 사랑은 유난해 한때 구단주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할 정도였으며, 이번 시즌 리버풀 FC를 반 경기 차로 누르고 우승 트로피를 차지할 때도 VIP석에서 열광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러니 자신이 만든 가장 유명한 노래 ‘Wonderwall’을 맨시티의 게임메이커에게 헌정했던 것.
본 공연이 끝난 후 앵콜곡으로 연주된 ‘Don’t Look Back In Anger’ 역시 오아시스, 그리고 노엘 갤러거의 팬이 가장 기다렸을 순간이다. 언제나 그랬듯, 노엘은 노래의 절정 파트를 관객에게 맡겼고, 객석에서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떼창이 폭발했다. 오아시스 시절부터 전 세계 어디 공연장에서나 똑같이 재현되는 장면이다.
이제는 클래식 반열에 오른, 이 노래의 절정을 채우는 관객의 목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노래 나이는 24세가 됐지만 관객의 목소리 나이는 이 노래보다도 어리게 들리기 때문이다. 명곡의 수명은 부르고 듣는 이들의 세대가 바뀔수록 길어진다. 이전 공연에 비해 전반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 약속의 순간, 공연장 온도는 치솟았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